<불안 세대>의 조너선 하이트, ‘아이의 스마트폰을 없애세요’ (번역)


*뉴요커의 데이빗 렘닉이 <불안 세대>의
조너선 하이트와 인터뷰한 내용을 번역했습니다.

조너선 하이트는 60세의 사회심리학자입니다. 자녀의 스마트폰이 정신 건강에 위협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의 새 책 <불안 세대:디지털 세계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가>는 뉴욕타임스 하드커머 논픽션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몇 시간이고 틱톡, 인스타그램, 스냅챗, 트위치, 페이스북 등 여러 소셜 미디어를 들여다보며 무표정하게 누워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부모들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하이트는 청소년 우울증과 불안이 급증하는 것의 원인을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의 확산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고등학교 이전에는 스마트폰을 허용하지 말자고, 그리고 16세 이전에는 소셜 미디어를 금지할 것을 제안합니다. ​​

조너선 하이트는 2018년에 그레그 루키아노프와 함께 <나쁜 교육>을 출간하며 문화에 대한 논쟁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미국 대학들이 엄격함보다 감정적 안전감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고 (=학생들의 정서를 과보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자유주의자이자 “데이비드 브룩스 스타일의 사회개선주의자”라고 묘사하며 사전 경고와 미세 공격(Microaggressions)의 개념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이트의 우려는 현실 세계의 청소년들이 과도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점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는 가상 세계에서는 청소년들이 오히려 충분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하이트는 기술 회사들과 소셜 미디어 플랫폼이 “중독성 가득한 콘텐츠의 대량 공급”을 설계하고 아이들이 사회적 활동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유년기의 개념을 대대적으로 재구성하고 있고, 인간의 정신적 발달 과정을 거의 상상할 수 없을 규모로 재편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최근 《뉴요커 라디오 아워》와의 대화에서 하이트는 체계적이고 학술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이론, 연구, 정치적 입장, 그리고 반론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 대화의 녹취록은 길이와 명확성을 위해 편집되었습니다.



(이하 뉴요커(데이빗 렘닉)) 직업상 저는 책을 읽어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면 제 폰을 방 저 끝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인정하죠. 그렇지 않으면, 제 주머니 속에서 자꾸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요. 스마트폰은 우리의 마음에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 걸까요?

(이하 조너선 하이트) 2007년에 첫 아이폰을 기억하는 청취자들을 위해 말하자면, 저는 2008년에 처음 아이폰을 샀습니다. 아이폰은 정말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였죠. 정말로 멋졌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아이폰을 꺼내 사용했죠. 

예를 들어,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가고 싶다면, 구글 지도를 쓰면 되었고, 음악을 듣고 싶다면 아이팟을 쓰면 되었죠. 정말 놀라웠습니다. 당시의 아이폰은 누구의 정신 건강에도 해롭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변화가 빠르게 일어났습니다. 스마트폰은 많은 사람에게 보조적인 존재에서 지배적인 존재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2008년에 앱 스토어가 출시되었고 2009년에는 푸시 알림이 도입되었습니다. 

이제 주머니 속에 있는 이 장치에 수천, 수백만 개의 회사들이 우리의 관심을 끌고, 우리를 그들의 앱에 묶어두려 합니다. 2010년에는 전면 카메라가 나왔고 같은 해에는 인스타그램이 등장했습니다. 인스타그램은 오직 스마트폰에서만 사용하도록 개발된 최초의 소셜 미디어였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갑자기 바뀌었습니다. 이제 아이폰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성인이기 때문에 이를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TV도 감당해왔고, 대부분은 “이걸 잘 다루면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성인의 정신 건강은 그다지 크게 악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정신 건강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세대 간의 차이에 대해 먼저 얘기해보죠. 저는 “TV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눈이 나빠지고, 청소년 소설을 너무 많이 보면 뇌가 흐물흐물해진다”는 이야기를 듣던 세대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라디오도, 텔레비전에서도 무사히 살아남았습니다. 이번에는 무엇이 다른 걸까요?

제가 자주 듣는 반론 중 하나도 “이것도 또 다른 모럴 해저드 아닌가요? 소크라테스도 글쓰기가 우리를 망칠 거라고 했잖아요! 인류는 젊은이들이 하는 모든 것을 끔찍할 거라 얘기했지만, 결국 그렇지 않더라고요.”라는 것입니다. 저도 이해합니다. 마치 양치기 소년 이야기처럼 말이죠. 

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이전에는 아이들이 TV를 보고, 훨씬 나중에 범죄율이 상승하더라도 TV와 직접적으로 연결 짓기 어려웠습니다. 실제로 아이들이 TV를 본다고 해서 밖에 나가 사람을 해치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TV가 그러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었고, 정신 건강 문제도 그렇게 대두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그 어떤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일어난 일은 이렇습니다. 인터넷은 두 번의 물결로 다가왔습니다. 8,90년대에는 개인용 컴퓨터가 등장했고 그 후에는 전화 접속 인터넷이 나왔습니다. 속도는 느렸지만 세상과 연결될 수 있게 해주었죠.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90년대의 기술 환경은 기적적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사랑했습니다. 

밀레니얼 세대는 이와 함께 자랐습니다. 그들의 정신 건강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심지어 2011년까지도 청소년 정신 건강의 많은 지표는 안정적이거나 개선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2012년과 2013년에 갑자기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그래프가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하고, 정신 건강은 절벽에서 떨어지듯 악화되었습니다. 그 변화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갑작스러웠습니다.

미국 사회의 변화에 대해 그 어떤 이론을 제시하더라도, 2012년과 2013년에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변화가 일어났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현상은 미국뿐만 아니라 캐나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 북유럽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그 시기에 특정 지역에서만 방출된 어떤 화학 물질이 특히 여성 청소년들, 특히 어린 소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가 발견된다면 차라리 좋겠습니다. 만약 누군가 그런 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겠죠.


당신은 2010년부터 2015년까지의 이 시기를 어린 시절의 “대대적인 재구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시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요?

“대대적인 재구성”이라는 표현으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폴더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전면 카메라, 인스타그램, 고속 데이터가 가능해졌던 날, 이 기기는 우리의 주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모든 아이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아이에게는 그렇습니다. 

“생각에 집중하기 어려울 때, 가볍게 즐길 무언가를 찾게된다”는 개념에 아이들은 훨씬 더 취약합니다. 사실 저도 그렇긴 합니다. 무언가 글을 쓰다가 잘 안풀리면 괜히 “날씨가 어떤가? 날씨를 한번 봐야겠다. 이메일에 뭐가 왔지?”라고 생각하며, 지금 해야 하는 일보다 훨씬 간단하고 즉각적인 일을 찾죠. 

하지만 성인인 저는 완전히 발달한 전두엽 피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전두엽 피질은 여전히 어린이의 형태에 가깝고, 충동 조절 능력은 매우 부족합니다.

그래서 스마트폰에 재미있는 놀이거리나 게임, 흥미로운 것들이 계속 존재하는 한, 그것들이 사용자를 자꾸 끌어낼 것입니다. 심지어 이건 소셜 미디어를 제외한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소셜 미디어는 2003년과 2004년에 마이스페이스, 페이스북, 프렌드스터와 함께 등장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해롭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뉴스 피드가 대두되면서 —페이스북이 뉴스 피드를 선구적으로 도입했고— 좋아요 버튼을 통해 엄청난 양의 정보를 수집하게 됩니다. 

이제는 뉴스 피드를 알고리즘화할 수 있게 되었죠. 2009년에는 트위터가 리트윗을 개발하고, 페이스북은 이를 본따 공유 버튼을 만들었습니다.

2009년과 2010년에 이르러 초바이럴 소셜 미디어가 등장했고,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심심하니까 비디오 게임이나 해볼까”가 아닙니다. 스마트폰에 알람이 떠서 ‘누군가가 너를 사진에 태그했어. 누군가가 너를 언급했어. 누군가가 네 게시물을 좋아했어.’ 이런 상황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회사들에게 아이들에게 직접 닿을 수 있는 핫라인을 열어준 셈이고, 그들은 언제든지 아이들을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언제든지 알림을 보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 알림을 끄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계속 켜두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이 설명하는 것과 당신의 책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걸 인간 의식의 변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우리가 쓰는 도구가 우리의 의식과 관념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해 우리는 오랜 기간 연구해왔습니다. 도구는 우리가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우리의 의식을 정의합니다. 

20세기의 미디어 이론가들은 TV가 사람들을 어떻게 훨씬 더 수동적으로 만드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앉아서, 보고, 즐기며, 모든 것을 오락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술의 변화가 생기면, 그 새로운 기술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어떻게 소통하든 혹은 세상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든,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변화시킵니다.

제 청소년기를 되돌아보면, TV를 그냥 보면서 시간을 흘러보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게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사회적이거나 심리적으로 건강했던 걸까요?

TV를 보는 것에 대해 부모님들은 불평하셨지만, 돌이켜보면 그 당시 TV 시청은 대체로 사회적인 활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TV를 보기도 하고, 그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하며, 중간에 먹을 것을 사러 가기도 하고,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것은 그래도 분명히 사회적인 활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Z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들은 가끔 친구 집에 놀러 가더라도 각자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명은 넷플릭스로 프로그램을 보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소셜 미디어를 확인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이 물리적으로 함께 있어도… 사회학자 셰리 터클의 멋진 표현이 있습니다. “휴대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다른 곳에 있다(Because of our phones, we are forever elsewhere)” 우리는 결코 완전히 현재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터넷 성인”의 나이를 만 16세로 올리자는 주장은, 그 미만의 아이들이 인터넷 전체에 접근하는 것을 막자는 것인가요, 아니면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같은 특정 플랫폼에만 접근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인가요?

이에 대해 미국에서 규제가 작동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둘 다 결국 끔찍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첫 번째는 COPPA(Children’s Online Privacy Protection Act), 즉 아동 온라인 프라이버시 보호법입니다. 이 법은 개인 데이터의 제공과, 부모의 지식이나 동의 없이 기업이 그 데이터를 수익화할 수 있는 나이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법안의 주요 작성자였던 에드 마키(Ed Markey) 의원—현재는 마키 상원의원—는 다양한 상담을 거쳐 16세를 적절한 나이로 생각했습니다. 16세는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 나이이며, 충분히 독립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양한 로비스트들이 힘을 합쳐 이 나이를 13세로 낮추는데 성공해버렸습니다. 그 결과로 사실상 아무런 집행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법의 내용상, 13세 미만이라면 부모의 동의 없이 기업이 데이터를 수집할 수 없지만, 실제로는 13세 미만이라는 사실이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 한 이를 집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회는 결국 “아이들이 몇살이든 스스로 13세라고 말하기만 하면 인터넷 어디든 갈 수 있게 하자”라고 결정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끔찍한 법이었죠. 그러고 나서 의회는 “기업들이 아이들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제공할 수 있으며, 부모들은 그들을 고소할 수 없다면 어떨까?”라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법안을 제안하고 있나요?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하는, 즉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는 조치는 이 법안의 나이를 13세에서 16세로 올리는 것입니다.

13세에서 16세로 나이를 올린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나요?

부모의 동의 없이도 서비스의 약관을 확인하고 데이터를 제공하는 성인으로 간주되는 나이를 13세에서 16세로 올리자는 것입니다. 11세 아이들이 그런 일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재는 그들이 13세라고 말하기만 하면 사용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불안 세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2010년대에 시작된 불안, 우울, 자해율의 급격한 증가입니다. 특히 여성 청소년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고 언급했습니다. 왜 여자 아이들이 남자 아이들보다 더 큰 영향을 받았나요?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갖게 되었을 때—곧이어 태블릿도 등장했고, 여러 장치가 보급되면서—그들이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는 점입니다. 

남자 아이들은 집단적인 경쟁, 예를 들어 전쟁 게임이나 스포츠 활동 등에 끌렸습니다. 그들은 비디오 게임, 특히 멀티플레이어 비디오 게임에 끌리게 되었고, 이는 그들에게 정말로 매력적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유튜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남자 아이들도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며, 인스타그램 계정 등을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여자 아이들만큼 열중하지는 않습니다.


​여자 아이들은 소셜 미디어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특히 인스타그램, 텀블러, 핀터레스트처럼 사진과 영상 중심의 서비스에 집중하죠. 그리고 이들의 상호작용은 비동기적입니다. 

남자 아이들은 같은 시간에 함께 웃고 즐기는 편입니다. 비록 서로 다른 방에 있더라도 최소한의 소통은 하고 있죠. 하지만 여자 아이들은 게시물과 사진을 올리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다른 아이들, 때로는 낯선 사람이나 성인 남성들이 댓글을 달기를 기다립니다. 

이것은 놀이가 아니라 퍼포먼스입니다. 일종의 브랜드 관리인 셈이죠. 이것이 소셜 미디어가 여자 아이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여러 이유 중 하나입니다. 소셜 미디어는 여자 아이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불안감을 자극합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당신도 동의하실 것 같은데, 소셜 미디어에는 다른 인터넷과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커뮤니티를 찾거나, 친구들과 소통하거나, 관심 그룹에 가입해 배우는 것 등 말이죠.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혹은 사회, 기술, 법률이나 부모가 당신이 말한 실제로 해로운 것과 잠재적으로 유익하거나 재미있고, 무해한 것을 구분할 있을까요?

총기, 알코올, 마약 등 모든 것에 대해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들 모두에는 긍정적인 용도와 부정적인 용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부정적인 면이 긍정적인 면을 너무나 압도해서 성인에게조차 사용을 허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죠. 

저는 성인에게 소셜 미디어가 제공하는 몇 가지 이점이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정보를 찾고 네트워킹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터넷은 소셜 미디어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코로나 기간 소셜 미디어 덕분에, 소셜 미디어가 없었다면 아이들이 서로를 어떻게 찾았겠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음, 아마도 아이들은 전화, 문자 메시지, 스카이프, 줌, 인터넷의 다른 부분의 서비스들, 구글 등을 사용할 수도 있었겠죠. 인터넷은 정말 훌륭하니까요.”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이렇게 설명을 해보곤 합니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만약 90년대에 악마가 세 개의 마법의 상자를 들고 와서, ‘이 첫 번째 상자를 보세요.’라고 말하며, 원하는 만큼 열 수 있지만, 상자를 열면 매주 15시간을 빼앗길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첫 번째 상자는 인터넷입니다. 이 놀라운 것을 얻을 수 있지만, 매주 15시간을 잃게 됩니다. 그 상자를 열겠습니까? 우리는 인터넷을 갖게되어 기쁩니까?” 

그러면 모두가 손을 듭니다. 우리 모두는 그 상자를 열게 된 것에 기뻐합니다. 그 시간은 실제로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상자는 스마트폰입니다. 이 상자를 열면 더 놀라운 디지털 만능 도구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또 다른 15시간을 매주 빼앗깁니다. 그래서 이제 매주 도합 30시간을 이 장치에 소비하게 됩니다. 이 상자를 열고 싶으신가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스마트폰을 가지게 된 것이 기쁩니까?” 

이 시점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또 손을 듭니다. “내 아이폰을 사랑해요. 스마트폰을 가지게 된 것이 기쁩니다.” 대다수의 성인이 “네, 우리가 그 상자를 열게 되어 기쁩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세요—이미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어서 매주 30시간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상자가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텀블러, 틱톡. 이것이 또 매주 15시간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매주 45시간을 사용하게 되는 거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그 상자를 열게 된 것이 기쁩니까?

대다수는 “그 상자는 열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가 인터넷과 다르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인터넷에서 떼어놓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주장은 어린 아이들이 법적 계약을 체결할 수 없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집행될 수는 없지만, 소셜 미디어의 이용 약관에 동의하는 것은 일종의 계약입니다. 그 계약은 자신의 데이터와 일부 권리를 자신들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 회사에 넘기는 것입니다.

그 회사는 아이들을 광고주에게 판매할 상품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저는 11세, 12세, 13세, 14세의 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착취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그런 방식으로 이용되기 전에 최소한 16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전 책인 <나쁜 교육>도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는 정서적 안전에 대한 과잉 보호, 즉 우리가 모든 것보다 안전을 숭배하거나 미화하는 개념에 대해 비판했죠. 그런데 이번 책에서는 소셜 미디어로부터의 정서적 안전을 강조합니다. 이전 책에서의 주장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나요? 

높은 수준의 안전이 필요할 때가 있고, 때로는 낮은 수준의 안전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위험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는 아이들이 들판에서 놀 때 헬멧을 착용하도록 강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맥락에 따라 다릅니다. 

제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는 아이들을 지나치게 과보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자유를 필요로 합니다. 반대로 가상 세계에서는 아이들이 충분히 보호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해하는 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조차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심각한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스스로 모순된 주장을 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쪽에서는 과보호하고 있어요. 저는 “조금 풀어주고,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세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다른 쪽에서는 보호가 부족하다고, “아이들이 하루에 9시간 동안 인터넷에서 낯선 남자들과 대화하게 놔두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당신은 대화 초반에, 모럴 해저드를 걱정하거나 이를 조장한다고 비판 받는 것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 비판을 어떻게 묘사하시겠으며,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그 비판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것이 만화책이나 텔레비전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18세기 토머스 제퍼슨의 시대에는 소설이 성적 욕망을 자극한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런 비판은 구조적으로는 타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iGen”을 쓴 진 트웬지(Jean Twenge)도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스마트폰이 한 세대를 망쳤다”는 제목의 ‘더 애틀랜틱’ 기사로 잘 알려져 있죠. 물론, 제목은 그가 지은 것이 아니라 ‘더 애틀랜틱’이 붙인 것입니다. 정말 후킹한 제목을 잘 만들었죠. 


그 제목이 잘못된 것이었나요?

당시에는 위험한 선택이었죠.

제목이 뭐였죠?

제목은 “스마트폰이 한 세대를 망쳤는가?(Have Smartphones Destroyed a Generation?)”였습니다.


에디터 입장에서는 훌륭한 제목이네요.

정말 그렇죠.

그 제목이 잘못된 것이었나요? 그 글에 부적절했나요?

많은 심리학자들이 그를 비판했습니다. “당신에게는 충분한 데이터가 없다. 당신은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고 말했죠. 트웬지가 가지고 있던 데이터는 이러한 문제들이 급증하고 있던 약 3년 치 데이터였습니다. 

그 문제는 2013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의 데이터는 2013년, 2014년, 2015년 것이었습니다. 데이터를 정리해 지면에 출판하는 데까지 약 2년이 걸리니 그는 사실 그 문제에 대한 딱 3년간의 데이터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그 제목이 섣부를 수 있었습니다. 틀릴 수 있었겠죠.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았지만요.

​그 이후 정신 건강에 대한 데이터는 매년 증가해 왔습니다. 이제 여러 가지 실험 결과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단순히 상관관계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수십 개의 실험이 진행되었고, 모든 실험이 유의미한 결과를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장기적인 연구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직접적인 증언이 있습니다. 이제 만약 Z세대에게 “틱톡이 발명되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싶나요?”라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들은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왜 소셜 미디어를 끊지 않나요?”라고 물어보면, 그들은 항상 같은 대답을 합니다. “끊을 수 없어요. 다른 모든 사람이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저는 경고를 과장하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회의론자들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럴 해저드를 자주 보지만,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해야 할 일은 “사실 이번에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불안 세대>에서 바로 그 점을 강조하려 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다르다”고 말이죠. 2017년에는 그것이 그렇게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코로나가 지나가고 혼란이 가라앉으면서, 우리 아이들이 망가져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코로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코로나 이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저널리스트가 저를 인터뷰할 때, 인터뷰 중 어느 시점에 “당신 책을 읽었는데, 이 일은 제 딸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신의 책에 나오는 상황과 똑같아요.”라고 말하곤 합니다.


당신의 작업에서 어떤 정치적 입장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걸까요? 당신의 책 <나쁜 교육>은 앨런 블룸의 <미국 정신의 종말>과 같은 성향과 주장을 가진 책들과 함께 놓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일부는 당신이 경고를 과장하거나 최신 유행에 대해 과도하게 걱정하는 노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조너선 하이트가 어떤 문제에 있어 사회적 보수주의자라는 인상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 같은데, 이것이 공정한 평가일까요? 아니면 잘못된 것일까요?

우리는 네거티브 정치가 만연한 양극화 시대에 살고 있으며, 비판하는 대상에 따라 평가받는 시대에 있습니다. 저는 항상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진보의 의미가, 그리고 좌파와 우파의 의미가 변해왔습니다. 

저는 여전히 존 스튜어트 밀을 따르는 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싶습니다. 또한 저는 <보보스>나 <인간의 품격>을 쓴 데이비드 브룩스와 생각이 같습니다.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시스템을 고민하며, 단순히 숫자만 들여다보는 방식이 아닌 정말로 섬세하게 생각해보자는 입장입니다. 문화적 흐름도 고려하면서, “우리가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좋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2015년에 대학들이 일종의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보았을 때, 저와 공동 저자인 그렉 루키아노프는 매우 걱정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보수주의자일까요?


직접 그런 주장을 접하셨나요?

네, 저는 NYU의 학생들 사이에서 이를 목격했고, 다른 교수들로부터도 이야기를 들었으며, 이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곳곳에서 접했습니다.

저는 교수라는 직업을 사랑합니다. 저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 이어지는 명예로운 길드의 일원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제가 속한 기관이 부패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사회과학에서는 사람들이 돈 때문에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지만, 하지만 제가 부패라고 본 것은 2011년에 말하기 시작한 내용으로, 제 분야에서는 모든 사람이 좌파에 속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회 심리학자들이 좌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2011년에 제가 한 강연에서 보수주의자를 찾기 위해 여러 단계를 거쳤는데, 겨우 한 명을 찾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머지 모두는 좌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건 우리에게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죠.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있었나요?

네. 그 부분은 성격에 따른 일반적인 자기 선택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술 분야는 항상 좌파 성향을 띠게 마련입니다. 이는 보수적인 성향과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 간의 심리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래서 예술, 사회과학, 특히 사회학 분야는 좌파 성향이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 질서를 의문시하는 사람들은 좌파 성향일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비율이 존재하게 됩니다. 

20세기에는 심리학에서 좌파와 우파의 비율이 약 3대 1이었습니다. 좌파가 3, 우파가 1인 비율이 자연스러운 비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절대로 이 비율이 50대 50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건 수치화된 것이었나요?

맞습니다. 교수들이 누구에게 투표했는지에 대한 여러 설문조사와 자신이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인지에 대한 자체 설문조사가 있었고, 이 결과들이 대체로 같은 결론에 수렴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우려했던 것은 균형을 맞추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균형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방 안에서 “그건 말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목격한 것은, 진보적인 견해에 맞는 결론은 쉽게 출판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이 결론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야.”라는 식으로요. 반면, 그와 반대되는 결론은 산을 넘어야 했고, 리뷰는 매우 혹독했습니다.

예를 들어, 코넬 대학의 스티븐 세시(Stephen Ceci)와 웬디 윌리엄스(Wendy Williams)는 과학 분야에서의 성 편향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그들의 연구는 과학 분야에서 여성들이 채용과 승진에서 어느 정도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지를 조사한 것이었죠. 그들이 발견한 것은, 전반적으로 여성에게 오히려 이점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히 어떤 시기를 조사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21세기, 최소한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여성에 대한 편향이 없었고, 오히려 여성에게 유리한 편향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충분히 타당한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결론을 출판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인기 있는 관점은 어디에나 성차별과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2011년에 주장했던 것은, 우리가 이 길을 계속 가고, 보수주의자들을 계속 비웃는다면—사실 학계에서는 보수주의자들에게 매우 적대적인 분위기가 있었습니다—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의 과학을 해치게 될 것이며, 공화당과 보수적인 주들로부터 어떤 지지도 얻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고등 교육에 대한 신뢰의 하락에 대해 글을 써왔습니다. 보세요, 제 정치적 입장이 무엇인지 물으셨죠. 제 사명은 도덕 심리학 연구와 다른 이들의 연구를 활용해 사람들이 분열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도록 돕고, 중요한 기관들이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소셜 미디어와 정신 건강 문제로 돌아가 보자면, 어떻게 이 상황을 되돌릴 수 있을까요? 기술 회사들은 연령 확인과 같은 필요한 변화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페이스북의 내부고발자인 프랜시스 하우겐은 인스타그램이 10대 이전의 어린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으며, 더 어린아이들에게 어떻게 접근할지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기술 회사들이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이러한 문제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현재의 정부와 함께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안이 무엇일까요?

먼저, 기술 회사들이 우리 아이들을 돕기 위해 사용자와 수익을 잃으면서까지 나서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좋겠지만, 상장사인 페이스북은 주주들이 높은 주가를 얻게 하기 위해 수익을 계속해서 증가시켜야 합니다. 자유 시장 경제에서 기업들이 순수한 선의로 사람들을 해치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석유 회사처럼 행동하겠죠.

맞습니다. 시장 메커니즘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만약 고객을 해치면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시장의 실패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고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페이스북에 돈을 지불하는  고객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바로 제품입니다. 그들의 주의력이 제품이죠. 실제 고객은 광고주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상황을 시장 실패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과거에 스턴경영대학원에서 전문적 책임과 비즈니스 윤리에 관한 강의를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시장 실패를 이해하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시장이 효율적이고 시장 실패가 없을 때는 윤리적인 문제가 거의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부자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고 그들이 그것을 사면 모두가 만족하게 됩니다. 

하지만 네 가지 유형의 시장 실패가 존재합니다. 기업들은 이것을 활용할 수 있을 때, 정말로 그렇게 하게 됩니다. 그렇게 평균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죠.

가장 중요한 시장 실패의 유형, 특히 중요한 것은 외부성(externalities)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타이어를 만들고 당신도 타이어를 만든다고 가정했을 때, 당신은 유독 폐기물을 적법하게 처리하는데 제가 모든 유독 폐기물을 그냥 강에 버린다면, 제 비용이 더 낮을 것이기 때문에 당신을 경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기 위해 규제가 필요합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비용을 떠넘길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유해한 외부효과는 소셜 미디어에 널리 퍼져 있으며, 정부가 개입해서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메타와 스냅챗에 대한 소송이 많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시장 실패는 독점입니다. 소셜 미디어 회사들이 완전한 독점을 하는 것은 아니고 경쟁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네트워크의 법칙에 따르면 한 번 임계를 넘은 규모는 대체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독점 기업은 시장에 대한 과도한 통제력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 분야에서 효율적인 시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정보 비대칭입니다. 각 당사자 모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다면 그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에서는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연구 과학자들은 페이스북이나 다른 이런 회사들로부터 데이터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 아이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우리를 광고 타겟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거의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큰 정보 비대칭을 초래합니다.

네 번째 시장 실패는 공공재의 착취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바다를 공유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이익을 위해 바다를 파괴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보행 도로 역시 일종의 공공재입니다. 우리는 식당이 인도로 확장하는 것을 어떤 규제 없이 허용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의 주의력도 일종의 공공재입니다. 몇 년 만에 몇몇 회사들, 특히 구글과 페이스북이 수십억 명의 주의력을 사실상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양의 주의력을 가져갔고, 우리는 그것을 되찾을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당신의 책에 대한 비판을 최소한으로라도 소개하지 않을 수 없겠죠. 과학 저널 네이처에 실린 리뷰가 있는데, 이 리뷰는 당신이 주장하는 디지털 기술이 아이들의 뇌를 재구성하고 정신 질환의 유행을 일으킨다는 주장이 과학적으로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제게 근거가 없다고 했죠.


캔디스 오저스는 그 리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청소년 뇌 발달 장기 연구인 Adolescent Brain Cognitive Development Study에서는 디지털 기술 사용과 관련된 극적인 변화의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의 주요 비판은 제 주장에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구분하지 못하며, 제 글을 통계학 입문 수업에서 사용할 수 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데이터가 대부분, 거의 모든 데이터가 상관관계에 관한 것이었을 때라면 그것은 타당한 비판이었습니다. 진 트웬지가 처음 글을 썼을 때도 그 비판은 타당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수십 개의 실험이 진행되었고, 다양한 출처의 데이터와 여러 종류의 실험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 부분을 놓친 건가요?

잘 보시면, 그의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제가 근거가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저는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만약 그가 “그는 실험 결과를 제시했지만, 나는 그 실험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면, 그것은 합리적인 비판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너무 단정적이었어요.

네, 제게 근거가 없다고 말한 것은 사실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답변에서 그 점을 지적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소셜 미디어가 아니라면, 무엇이 원인일 수 있을까요?

좋은 질문입니다. 그것이 네이처 리뷰의 두 번째 문제입니다. 저는 네이처에 계속해서 대안 이론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좋아요.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가 원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상황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묻고 있는 것이죠. 

물론, 세상이 끔찍하죠. 그게 또 다른 이론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생태적 위협을 더 많이 느끼고, 세계 정치가 정말 끔찍하며, 우리가 2016년과 마찬가지로 11월에 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점 등..

맞아요. 상황이 나쁘다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오늘날 보면 실제로 그래요.

하지만 오바마의 첫 번째 임기로 돌아가 봅시다. 2008년부터 2012년 사이 오바마의 첫 번째 임기 때 상황이 얼마나 나빴나요? 우리는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었고, 회복 중이었으며, 그의 두 번째 임기 때 경기는 점점 나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정신 건강이 붕괴되었나요? 아이들이 갑자기 “세상이 너무 끔찍해!”라고 생각한 때가 그때였나요? 신문을 읽는 것은 아마 고등학생들이었을 테지만, 이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여자 중학생들입니다. 

2013년에 갑자기 11세에서 14세 사이의 여자 아이들이 세계 정치 상황에 대해 공포에 휩싸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미국뿐만 아니라 캐나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에서도 발생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과 저는 비슷한 시대에 자랐죠—당신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어렸을 때 “올해는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앞으로 20년간은 어떨까?”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핵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꽤 있다고 느꼈고, 인구 증가가 우리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70년대에는 세상에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우리 세대는 그로 인해 우울해지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이 ‘불안한 세대’는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평생 외롭고 단절된 상태로 자라게 될까요? 아니면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일까요?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는 20대의 젊은이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U자형 곡선이라는 개념이 있었는데, 이는 10대 후반과 20대의 젊은이들이 60대와 70대의 사람들과 함께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중년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덜 행복했죠. 이것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적으로 사실이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전문가인 데이비드 G. 블랜치플라워(David G. Blanchflower)가 공동 작성한 연구 보고서가 최근 발표되었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국제적으로 행복의 U자형 곡선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34개국을 조사했으며, 현재는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이 실제로 가장 행복하지 않거나, 가장 불안한 시기라는 결과를 발견했습니다—측정 기준에 따라 다르지만 말이죠. 

젊은 세대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과거에는 가장 행복했던 이들이 이제는 가장 행복하지 않은 세대가 된 것입니다. 이들이 20대가 되면서 이런 상태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아직 그럴 가능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Z세대는 어떻게 될까요? 사춘기 동안 충분히 보호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뇌에는 지속적인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큽니다. 사춘기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그들의 뇌 구조가 재구성된다. 이것이죠.

뇌는 문자 그대로 재구성되고 있습니다. 뉴런들이 서로를 찾아가며, 사용되지 않는 뉴런은 사라지고, 시냅스는 형성되거나 사라집니다. 이런 과정은 생애 첫 몇 년 동안 매우 빠르게 일어나며, 그 이후로는 속도가 느려집니다. 그러나 사춘기에는 다시 속도가 빨라집니다. 

그래서 사춘기는 정말 중요한 재구성 시기입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성인으로의 전환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제공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에게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줄 뿐입니다. “알고리즘에 의해 무작위로 선택된 사람들이 너희들을 성인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줄거야. 그것이 지금 너희의 뇌를 재구성하는 방법이니까”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Gen Z가 평생 더 불안하고 취약한 상태로 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닐 가능성은 있지만, 우리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낙관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그들이 스스로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정도일 것입니다.

저는 NYU 스턴경영대학원에서 “플로리싱(Flourishing)”이라는 긍정심리학 과목을 가르칩니다. 이 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 중 하나는 학생들과 함께 그들의 스마트폰 알림을 검토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하루에 받는 알림은 대개 200에서 500개 정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섯 개 앱을 제외한 모든 앱의 알림을 꺼보세요. 예를 들어, 우버 같은 앱은 분명히 유지하고 싶겠죠. 차가 오고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뉴욕타임스나 뉴요커, 또는 다른 어떤 곳에서 오는 업데이트가 정말 필요한가요?”라고 말합니다.

맞아요.

아, 뉴요커는 예외죠. 제가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뉴요커는 다르다고요.

앗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기쁘네요.

대부분의 학생은 이메일이 올 때마다 알림을 받습니다. 그래서 스팸 이메일이 오더라도 그들의 일상은 방해받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일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자신들의 집중력과 주의력을 보호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Close Up Of Children Reading On Window Seat

저는 그들에게 주의력이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고 얘기합니다. 돈은 계속해서 벌 수 있지만 주의력에는 절대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주의력을 늘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 한정된 주의력을 누구에게 어디에 줄 것인가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회사들에게 당신의 주의력을 매일 빼앗아 가도록 허용할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말합니다. 

한번 그렇게 이야기하면, 학생들은 거의 모든 알림을 끄려 노력합니다. 이는 놀라운 결과로 이어지죠. 처음으로 명징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되고, 과제를 집중해서 할 수 있으며, 불안감이 줄어든다고 말합니다. 

현대의 삶은 우리 모두를 조각내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를 조금씩 되돌리면 그들의 정신 건강이 개선됩니다.

하지만 그건 꼭 사람들이 명상원에 가서 수행하는 것 같은 극기를 요구하는 것 같기도 해요. 

아니요. 그냥 알림을 끄는 것입니다. 수업 시간에 하는 것이에요. 자기 통제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저 알림을 끄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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