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저자 니콜라스 카가 뉴 아틀란티스에 기고한 글을 번역했습니다.
지금껏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좋은 때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미디어 이론가 해럴드 이니스(Harold Innis)가 남긴 경고를 다시 돌아볼 때다. “통신 수단은 엄청나게 발전했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의 이해를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들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내릴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
— G. W. F. 헤겔
1947년 5월 25일 저녁, 캐나다 왕립학회의 회원들, 즉 이 나라를 대표하는 과학자, 예술가, 지식인들은 퀘벡시의 샤토 프롱트낙에 모였다. 모두가 기다려 온 행사는 바로 학회장이던 해럴드 애덤스 이니스(Harold Adams Innis)의 강연이었다. 당시 이니스는 캐나다에서 손꼽히는 석학이자, 전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정치경제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철도 운송, 모피 무역, 어업, 목재, 제지와 같은 캐나다의 주요 산업을 전면적으로 분석하고 방대한 사료 조사로 뒷받침한 책과 논문들을 잇달아 내놓았는데, 이를 통해 캐나다인들이 자국의 경제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까지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날 모인 참석자들은 이 위대한 학자가 다음에는 어떤 연구를 펼칠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미네르바의 올빼미(Minerva’s Owl)”라는 제목의 이 강연은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말았다.
지식과 소통에 관한 지루하고 복잡한 이야기로, 이전의 연구들과는 그다지 연관성이 보이지 않았고, 청중들은 그 강의를 이해하지 못한 채 실망감만을 안고 자리를 떴다.

그러나 강연 이후 4년이 지나, 이 강연이 이니스의 저서 <커뮤니케이션 편향>의 첫 장으로 게재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강연과 달리 활자로 읽어도 여전히 어렵고 답답한 부분은 많았지만, 인내심 있게 읽어내려간 독자들에게는 마치 계시와도 같은 통찰이 되었다.
여기서 이니스는 소통 체계가 한 사회의 구조와 그 운명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아주 폭넓게 고찰한다. 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점토판에 설형문자를 새기던 시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라디오가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사용되던 시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대에 걸친 예시를 들어 설명했다.
어떤 새로운 통신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그 사회는 “문화적 혼란(cultural disturbances)”을 맞게 되고, 이로 인해 역사의 흐름이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미디어는 단순한 정보 채널을 넘어, 정치적 영향력과 제국의 권력을 행사하는 도구이며, 문명을 빚어내는 조각가이기도 하다는 말이었다.
이처럼 미디어가 사회 발전의 형성 원리를 제공한다는 관점은, 그 글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20세기 후반에 태동한 ‘미디어 연구’라는 학문 분야의 창시 문헌—아니,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창시 문헌—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1964년, 이니스와 마찬가지로 토론토대학교 교수였던 저명한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맥루언은 자신이 얼마 전에 낸 책 <구텐베르크 은하계>를 두고 “이니스의 주석”일 뿐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교육학자이자 미디어 이론가인 제임스 캐리는 이니스의 업적을 “이 대륙에서 이루어진 커뮤니케이션 연구 중 가장 위대한 성취”라고 평했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 편향>이 출간된 다음 해인 1952년, 이니스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8세였다. 맥루언은 이후에도 논쟁적 저작을 내놓으며 널리 회자되었지만, 이니스와 그의 다소 난해한 사색들은 오늘날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잊힌 이름이 됐다.

그의 이름은 학계 사무실이나 학회, 학술지 바깥에서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니스의 사상은 다시 한 번 살펴볼 가치가 있다. 그가 75년 전 남긴 글들은 지금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미디어가 유발한 문화적 혼란’을 뜻밖에도 분명하게 설명해주는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영속성을 무자비하게 파괴한다’
커뮤니케이션 체계는 교통 체계이기도 하다. 어느 매체든 정보를 ‘여기서 저기로’ 옮기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생각이나 의견, 지시나 명령, 예술 작품이나 오락물이든 마찬가지다.
이니스가 간파한 사실은, 어떤 매체들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데 탁월하고, 또 어떤 매체들은 시간을 통과하는 데 탁월하다는 것이다. 즉 어떤 매체는 공간 편향(space-biased)이 강하고, 어떤 매체는 시간 편향(time-biased)이 강하다. 매체가 보유한 물리적 특성 때문에, 그 매체가 전달하는 정보가 공간과 시간 중 어느 쪽에 더 잘 맞는지가 갈린다는 것이다.
시간 편향의 매체는 보통 무겁고 오래간다. 오래 유지되지만, 이동하기 어렵다. 예컨대 화강암이나 대리석으로 만든 묘비를 생각해보자. 비문은 수 세기 동안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지만, 그 묘지를 직접 찾아가는 사람만이 그 메시지를 볼 수 있다.
반면, 공간 편향의 매체는 가벼워서 휴대가 쉽다. 어디든 들고 갈 수 있지만, 쉽게 낡거나 손상된다. 일례로 얇고 저렴한 신문용지를 떠올려보라. 아침에 대규모로 배포하여 넓은 지역에 있는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지만, 저녁이 되면 대부분 버려진다.

사실상 모든 사회가 소통 행위를 통해 조직되고 유지되므로, 매체의 편향은 단순히 메시지가 얼마나 오래가는지, 얼마나 넓게 퍼지는지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규모나 형태, 특성은 물론 궁극적으로 그 사회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사회학자 앤드류 워닉은 1999년 이니스에 관한 글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매체의 이동성(portability)은 제국이나 제도, 문화가 확장되는 정도에, 매체가 가진 내구성(durability)은 그들의 수명에 영향을 준다.”
시간 편향 매체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전통과 의식을 중시하고, 과거와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데 힘쓴다. 대개는 종교나 신화 같은 믿음을 대대로 전수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이 결속한다. 연장자는 존중받으며, 권력은 보통 신정 정치(theocracy)나 군주에게 집중된다.
그 사회는 지식과 권위를 광범위한 영토에 신속히 전할 수 있는 수단이 부족하므로, 대체로 영토가 작고 폐쇄적인 형태를 띤다. 만약 영토가 확장된다 해도, 똑같은 전통과 신앙을 공유하는 자급형 작은 공동체들이 분산되어 형성되는 식이다.
반면, 공간 편향 매체가 지배적이 되면, 그 사회는 확장성을 추구하게 되고, 문화적 초점 역시 과거 전통 유지에서 ‘진보’를 향해 옮겨간다. 과거와 결별하는 일조차도 혁신으로 환영받는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통합해야 넓은 영토를 다스릴 수 있으므로, 사람들을 묶어두는 접착제는 더 이상 공유된 믿음이 아니다.
대신 중앙 권력이 부과하는 법과 규제가 역할을 한다. 행정가들은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통신 수단을 이용한다.
이니스는 어떤 매체도 순수하게 시간 편향 혹은 공간 편향만 갖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오히려 각각의 매체가 견고함(시간성)과 이동성(공간성)이라는 스펙트럼 위 어딘가에 놓인다고 봤다.
예컨대 무거운 돌에 새긴 글이라도, 충분한 노력만 기울이면 어딘가로 옮길 수 있으며(모세가 돌판을 산 아래로 들고 내려온 것처럼), 신문의 과거 호도 도서관이나 아카이브에 보존해둘 수 있다.

동시에, 어떤 공동체 안에서도 전통·안정 지향과 진보·변화 지향 사이에는 끊임없는 긴장이 존재한다. 매체가 다양해질수록 이 긴장은 더 커진다. 이니스가 주장한 핵심은 그 긴장을 파괴적이 아니라 건설적인 상태로 유지해야 사회가 활력을 얻고 오래간다는 점이다. 즉 시간 편향과 공간 편향 간에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전통과 안정에 치중하면 사회는 침체하고 활력을 잃는다. 반대로 성장과 변화를 과도하게 추구하면, 사회는 결속력과 목적의식이 약화되면서 퇴폐(decadence)로 흐른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사회는 결국 병든 사회가 된다.
문자가 발명된 몇 천 년 전부터 이어진 문명사를 한편으로 정리해보면, ‘필기도구와 기록 매체가 어떻게 변해왔는가’에 대한 역사라고도 볼 수 있다.
글쓰기 자체는 인간의 ‘관찰’이나 ‘사고’가 그 사람의 수명과 무관하게 지속될 수 있게 하는 것이어서 ‘시간 편향적 기술’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글의 이동성을 높이는 혁신이 주로 일어나 왔고, 그 과정에서 내구성은 종종 희생됐다.
무거운 돌이나 점토판은 더 가볍지만 여전히 다루기 불편한 파피루스 두루마리나 양피지로 대체되었고, 이것들은 다시 종이(더 가벼운 문서)에 자리를 넘겨주었다.
도시 국가나 민족 국가가 영토와 영향력을 확장하려 할수록, 정보의 ‘시간적 이동’보다 ‘공간적 이동’이 우선시되었다. 이니스는 다른 저서 <제국과 커뮤니케이션>(1950)에서 이렇게 썼다.
“칼과 펜은 함께 작동했다…. 서명하고 인장 찍고 신속히 전송되는 문서가 군사력과 정부 확장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작은 공동체들은 큰 국가로 편입되고, 그 국가들은 다시 제국으로 합쳐졌다.”
이후 인쇄기가 등장해 필사자를 대체하면서, 문서가 육로나 해상을 이동하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오늘날 우리는 계몽주의 이후 형성된 시각에 익숙하기에, 문자 커뮤니케이션의 물질적 역사를 ‘지식과 이해가 확산되는 반가운 이야기’로 생각한다. 그러나 영국 제국의 영향 아래에 놓였다가 다시 미국 제국의 영향 아래에 놓인 캐나다 출신 정치경제학자로서 이니스는 이런 진보 서사를 덜 낙관적이고 더 복합적으로 바라봤다.
정보가 빠르게 유통되며 생기는 이점—특히 과학 기술 발견 속도가 빨라진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미디어가 선전·독재·조작과 통제의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늘 의식했다.
미디어를 통해 흐르는 것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권력’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니스는 분명히 보았다. 미네르바(Minerva)는 지혜의 여신이었지만, 전쟁의 여신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커뮤니케이션의 편향이 인간의 지각을 형성한다는 점을 간파했다. 즉 이 매체들은 사람들의 사고방식 자체뿐 아니라, ‘사람들이 사고방식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까지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다. 이니스가 보기에, 현대 사회는 ‘공간 정복’에 집착한 나머지 ‘시간 감각’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사방에서 밀려오는 정보를 계속 받아들이느라 “현재에만 몰두(present-mindedness)”하게 되었다. 한 발짝 물러서서, 이 정보를 폭넓은 역사·문화적 맥락에서 해석할 여유가 사라진 것이다. 눈앞의 현안과 잡다한 오락에 파묻혀, 해석이라는 어렵고 더딘 과업은 외면된다.
19세기~20세기 들어 통신이 상업화되고, 이어 전기통신과 방송으로 미디어가 확장되면서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거대한 자본 투자를 회수하려는 기업들은, TV·라디오·출판 사업 등 미디어 제국을 세우며, 소비자들을 늘 새로운 정보에 묶어 두면서 돈을 벌려는 강한 동기를 갖게 되었다.
시간을 갖고 생각하고, 순간의 관심을 넘어서는 폭넓은 시야를 제시하는 일은 기업 이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니스는 마지막 저서 <시간 관념의 변화>에서 대형 미디어 기업들이 “커뮤니케이션의 독점을 형성하며, 문화 활동에 필수적인 영속성을 지속적으로, 체계적으로, 무자비하게 파괴한다”고 우려를 표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 말미에서, 이니스는 드물게 간결한 어조로 자신의 관점을 요약한다.
“통신 분야는 엄청나게 발달했지만, 이해(understanding)는 더욱 어려워졌다.”
바로 이 놀랍고 겉보기에 역설적인 한 문장으로, 그는 현대 미디어, 더 나아가 현대 사회가 지닌 근본 가정을 흔들어 놓았다. 즉, 정보(information)가 많아지면 지식(knowledge)도 함께 늘어난다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에게서, 정보와 지식은 때때로 서로 적대적인 관계였다.

‘따끈따끈한 쿠키처럼’
이니스가 세상을 떠난 뒤 40년, 인터넷의 등장은 마침내 ‘시간’과 ‘공간’을 조화롭게 결합하는 새로운 미디어 시대가 열렸음을 예고하는 듯 보였다. 인터넷은 역사상 유례없는 범위로 정보를 전송하는 통신망이자, 동시에 그 방대한 정보를 저장하는 기억 장치였다.
전 인류의 문화를 아우르는 유산(고대 문헌부터 최신 팝송까지)을 손쉽게 검색하고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고, 또 분산형 설계를 지녔기에(웹상의 수많은 노드들이 상호 연결되는 구조), 어느 국가나 기업도 그 정보를 중앙에서 통제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퍼졌다. 정보가 자유로워지고, 소통이 민주화되며, 사람들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오늘날의 복잡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초창기의 이상주의는 착각이었다. 인터넷은 등장 직후부터 이미 균형을 잃어버렸고, 그 엄청난 ‘공간적 도달 범위’가 깊이 있는 ‘시간성’을 오히려 잠식했다. 사람들의 ‘순간 만능주의’를 완화하기는커녕, 인터넷은 더욱 부추겼다.
이니스가 살아 있었다면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디지털 정보는 ‘무게가 없다’ 보니, 장거리 즉시 전송에 최적화되어 있다. 신문 용지를 갖고 있는 것조차 ‘시멘트 벽돌 같다’고 여겨질 정도다.
데이터 센터, 광섬유 케이블, 이동통신 기지국, 와이파이 라우터 등으로 구성된 인프라는 방대한 양의 정보를 가능한 한 ‘동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네트워크 엔지니어나 개발자들도 늘 이런 목표—데이터 전송량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그렇게 해서 소비자에게 도달한 정보는 다시 다른 흐름으로 전환된다. 즉 빛나는 픽셀과 움직이는 광 패턴으로 이루어진 이미지 스트림이 되어 화면에 나타난다.
특히 지금 대세인 ‘터치스크린’ 형태의 인터페이스는 늘 사용자에게 묵은 것을 지우고 새로운 것을 불러오라고(클릭, 스와이프, 스크롤, 업데이트, 리프레시) 유혹한다. 인쇄된 책이 ‘새겨진(inscription) 기술’이라면, 스크린은 ‘지워내는(erasure) 기술’이다.
이런 기술적 특성은 자본의 이해관계에 의해 만들어진다. 지난 25년간 인류가 가장 신뢰해 온 지식 도구였던 ‘구글’ 검색엔진의 진화만 봐도 알 수 있다. 1998년 창립 후 몇 년간, 구글은 대학원생 출신 창업자들이 말하던 ‘학문 분야의 엄밀함’에 영감을 받아, “어떤 주제든 최고의 정보를 가진 출처를 찾겠다”는 단순 명확한 목표를 세웠다.
논문의 학술 인용평가 방식을 흉내 낸 ‘하이퍼링크 분석’을 통해, 검색엔진은 오랜 시간 검증을 거친 자료를 상위에 올렸다. 소프트웨어가 과거로 거슬러갈수록, 검색 결과는 더 정교해졌다. 초창기 구글을 쓰는 일은, 세계에서 가장 박식한 사서를 부리는 기분과 같았다.
그러나 광고로 수익을 내기 시작하면서, 구글은 점차 검색 결과를 ‘미디어 콘텐츠’로 보기 시작했다. 이제 목표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시청자’로 끌어들이는 것이 되었다.
2010년, 구글은 ‘카페인’이라는 코드를 통해 검색 시스템을 전면 개편했고, 검색 결과가 얼마나 ‘최근 것’인지(신선함, freshness)를 대폭 중시하기 시작했다. 1년 뒤, 당시 구글 검색 부문 책임자 아밋 싱할은 회사 공식 블로그에 이런 글을 썼다.
“검색 결과란, 갓 오븐에서 나온 쿠키나 무더운 여름날 먹는 시원한 과일처럼, ‘신선할 때가 제일 좋다’. 직접 [검색 옵션]에서 명시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연관성이 높고 최근의’ 결과를 원할 것이다.”
정보가 ‘순간 소비되는 상품’이 된 환경에서, 구글은 정보가 금방 가치가 휘발된다는 사실—쉽게 낡고 상한다—을 깨달은 것이었다. 과거는 참여도(engagement)가 떨어지고, 따라서 ‘수익화’도 어려웠다. 오늘날 구글을 사용한다는 건, 아카이브가 아니라 ‘시끌벅적 시장’에 발을 들이는 일에 가깝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소셜 미디어 기업들은, 시작부터 적극적인 ‘공간 편향’을 추구했다. 이는 결국 이니스가 가장 우려했던 상황—정보로 제국을 세우고, 커뮤니케이션을 독점하는—을 현실화했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는 전 세계적 커뮤니티(global community)를 구성할 때까지 만족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자사가 ‘세계의 소셜 인프라’를 책임지겠다고 주장했다.
인터넷에 물리적 ‘중앙’은 없어 보일지 몰라도, 사용자 신원 시스템, 정렬 알고리즘, 기타 독점적인 소프트웨어 규칙과 프로토콜을 통해서는 얼마든지 중앙 통제가 가능함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소셜 네트워크에 로그인하는 순간, 그들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다. 때로는 제국의 봉신(serfs)이 되기도 한다.
스마트폰이 소셜 미디어 접속의 기본 경로가 되기 전, 즉 웹사이트 버전으로만 소셜 플랫폼이 돌아가던 시절 대부분은, 최신 게시물이 맨 위에 올라오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래로 밀려나는 ‘최신순 정렬’을 사용했다.
가장 최근 상태글, 댓글, 사진이 우선순위를 가져 피드 최상단에 보이고, 상대적으로 오래된 글은 차차 아래로 내려갔다 사라지는 식이었다.
이 방식은 현재 시제를 강하게 강조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성’을 내포했다. 사용자가 스크롤을 내릴 때, 비록 몇 시간 혹은 며칠 안 되더라도, 과거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흐름이 있었다.
하지만 스마트폰 터치스크린으로 피드를 전면 개편하면서, 대부분의 플랫폼은 “역순 시간 정렬”을 기꺼이 버렸다. 이제 피드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잠시라도 집중할 가능성이 높은 정보’를 최우선으로 보여주는 식으로 바뀌었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즉시성(immediacy)’이다. 시간은 사라졌다. 오늘날 틱톡(TikTok), 인스타그램, 엑스(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에 쏟아지는 정보는 “잠깐의 유효성”만이 있다.
철학자 한병철은 이것이 “놀라움을 유발하는 능력”만으로 살아간다고 표현한다. 놀라움을 주면 다음 놀라움으로 곧바로 넘어간다. 여기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오직 지금뿐이다.

한 줄기 희미한 빛
이니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를 기술에 너무 많은 것을 의존하는 ‘기술 결정론자’라 불렀다. 하지만 사실 그는 현실주의자였다. 기술 효과는 경제적·정치적 힘, 그리고 인간 본성의 변화무쌍함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언제나 커뮤니케이션을 ‘역사의 반복과 단절’이라는 맥락에서 함께 살폈다.
이처럼 여러 사회적·기술적 복잡성을 포괄하는 시야 덕분에 그의 글은 때때로 단편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어째서 디지털 미디어가 기대와는 전혀 다른 길로 우리를 이끌었는지 이해하는 데 강력한 모델을 제시한다.
정보가 그렇게 풍부하고 네트워크 구조가 분산형이라고 해도, 결국 자본이 걸린 ‘빛의 속도’ 전송을 우선시하는 경향 그리고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끊임없는 오락과 자극 갈망이 결합된 결과, 전례 없이 거대한 정보 제국이 만들어져 버렸다. 오늘날의 미디어 공룡들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정보를 제공하지만 정작 지식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이니스는 결국 보여주지 못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방향을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한 희망을. 그가 쓴 미디어 관련 글들은 비관적 어조와 우울한 전망에 물들어 있다.
그에게 지금 소비자들의 “순간에만 매달리는 자세”는 안락한 덫이다. 긴 안목을 차단하고,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제대로 보지 않는다. 그러며 현대가 과거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자만심만을 키운다.
사람들은 ‘유행’ 혹은 ‘정통’에 쉽게 휩쓸리고, 거대한 미디어 채널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프레임 안에서만 사고하게 된다. 서구 문명을 평생 연구해온 이니스는 그 문명이 사라질 위기도 감지했다. 1951년에 그는 이렇게 썼다.
“2000년의 서구 문명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각 문명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살’을 택한다.”
그럼에도 해가 지는 하늘에 어슴푸레하게나마 빛 한 줄기는 남아 있다. 고전 역사와 철학에 해박했던 이니스는 고대 그리스 문화의 중심에 있던 대화와 토론, 교육과 개인 교습 같은 구술 전통(oral tradition)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한 ‘친밀하고 인간적인 규모’가, 기계화된 미디어의 지배에서 벗어날 길을 열어줄 거라 여겼다.
말로 전해지는 한 문장은 트윗이나 스냅 사진만큼 덧없이 사라질 수 있으나, 직접 한자리에 모여 말하고 듣는 행위만큼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공동 사유를 이끌어낼 매개체도 없다고 그는 보았다.
그것은 정보를 단순히 사람 간에 옮길 뿐 아니라, 해석과 검증을 거쳐 지식을 정련해 나가도록 돕는다. 이니스가 암시하듯, 이런 구술 전통을 되살리는 일이야말로 오늘날 “순간의 폭정(tyranny of now)”에 맞설 마지막 방어선일지 모른다.
- 원문: 뉴 아틀란티스 https://www.thenewatlantis.com/publications/the-tyranny-of-now
- 번역: o1 / 편집: 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