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웹진 록페이퍼샷건의 닉 루벤의 리뷰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Clair Obscur: Expedition 33, 이하 ’33 원정대’)는 프랑스 스튜디오 샌드폴 인터랙티브(Sandfall Interactive)의 데뷔작입니다.
이 사실이 제게 주는 메시지는 두 가지예요. 첫째, 이 사람들이 정말 엄청나게 말도 안된다는 것, 둘째도 진짜 너무너무 엄청엄청 말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샌드폴, 이러면 반칙이죠. 데뷔라면서요. 《로스트 오디세이(Lost Odyssey)》나 《레전드 오브 드라군(Legend of Dragoon)》 못지않은 화려함과 실험정신에, 두 미야자키(하야오와 히데타카)가 엄지씨름을 벌이고 옆에서 요코 타로(Yoko Taro)가 뒹구는 듯한 기묘한 아름다움과 장난기를 한꺼번에 끼얹은 턴제 RPG를 들고 나타나다니요.
프랑스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제 고향에서는 첫 작품으로 이렇게 명확한 비전을 보여주는건 거의 불법이라고요—이렇게 진지하게 감정을 쏟아붓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사실, 이 게임이 오페라 같은 연출과 ‘리사 심프슨급’ 기교를 총동원해 감탄과 눈물을 다 뽑아내려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혹은 과하다 느끼실 분도 계실 거예요.
저요? 요즘엔 좋아하는 게임에도 썩 잘 빠지지 못합니다. 메시지 확인을 한 시간쯤 미뤄줄 작품만 나와준대도 아주 만족합니다. 그런데 33 원정대의 빼어난 전투 시스템에 끌려버렸고, 그 여정 자체에 완전히 홀렸습니다. ‘와 요즘도 이런 게임이 있구나’ 싶은 경험이었죠.
“피 한 방울 없는 단두대”
주인공 귀스타브(Gustave)의 누이 엠마(Emma)는 매년 루미에르(Lumière) 시민이 나서는 원정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저 먼 지평선 너머 ‘화가(Paintress)’라 불리는 존재를 쓰러뜨리러 가는 여행이죠.

화가는 모놀리식 돌기둥에 해마다 새로운 숫자를 적어 해당 나이의 사람을 꽃잎과 먼지로 흩어지게 없애 버립니다. 축제 날, 죽음의 차례가 된 이들은 목에 붉고 흰 화환을 걸고 작별 인사를 나누며 남은 사람을 위해 가구를 거리로 내다 놓습니다.
67년째 돌아온 원정대가 없고, 한때 영예롭던 여정은 죽음과 실패의 그림자를 뒤집어썼습니다. 뒤따르는 이들은 내년 ‘불운한 자들’을 위해 조금 덜 험한 길이나 닦아 두자는 심정으로 체념하곤 합니다.
하지만 로버트 패틴슨과 키어런 컬킨을 반씩 섞은 듯한 발명가 귀스타브는 이번엔 다를 거라 확신합니다. 그보다 절반밖에 안 되는 나이인데도 원정에 끼어든 딸 마엘(Maelle)도 마찬가지고요. 콘크리트 카니발처럼 뒤틀린 루미에르의 거리에서 비장한 각오를 다진, 와인에 취한 원정대는 어두운 희망을 품고 떠납니다.
그리고 곧바로 지옥으로 빠져들죠. 대륙은 ‘벨 에포크 시대의 파이널 판타지 X’가 《라비린스》와 《서던 리치: 소멸의 땅》을 만난 모습입니다.

유막처럼 빛나는 색채, 황혼 숲을 비집고 움직이는 기계 구조물, 산호처럼 말라붙은 시신, 동화 속 섬에 우뚝 선 멜포·탈리아 가면 모양의 거석…. 신생의 약속과 시간의 종말이 공존하는 풍경입니다. 30시간짜리라는데 45시간을 플레이했거든요. 그런데 아직 끝이 없네요.
손으로 ‘회피·패링’하는 턴제 전투
‘턴제 RPG지만 공격을 회피·패링할 수 있다’—말만 들으면 좀 사기 같지만, 샌드폴은 손을 놀릴 거리만 던져 준 게 아닙니다. 생생한 애니메이션 덕분에 적마다 ‘소울라이크’한 타이밍이 따로 있고, 춤추듯 비틀고 꿈틀대는 존재감 덕에 전투가 손끝으로 살아 있습니다.

JRPG를 하면서 중간에 간식 한입 베어물던 분이라면 이렇게 집중력을 쏟아야 하는 상황이 성가실 수도 있지만, 전투에 감정만 이입하면 자발적으로 모든 싸움을 찾아다니게 되는 짜릿함이 있습니다.
반사신경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화가에게 닿으려면 캐릭터 능력·장비·특성(Perk)을 겹겹이 섞어 기상천외한 콤보를 뽑아내야 하죠.
스택 쌓고 ‘현금화’하듯 상태 이상을 터뜨리거나, 액션 포인트(AP)와 재턴(Repeat Turn)을 쥐어 짜내는 등 덱 빌더식 실험거리도 풍성합니다. NG+ 중반인 지금도 예전 꼼수를 새 방식으로 비틀며 끔찍하게 강력한 조합을 계속 발견 중입니다.

다섯 명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확실히 개성이 달라요. 인형 몬코(Monoco)는 잘린 다리를 폰으로 바꿔 ‘포켓몬’처럼 소환하고, 과학 마녀 뤼느(Lune)는 원소 스택을 예금·인출하듯 굴립니다.
15분 공들여 짠 세팅이 마음에 들어 실험을 미루다 난이도 급상승에 한번 후드러 맞고 나서야 다시 창의력을 짜내야 하곤 하지만, 서둘러 스토리를 보고 싶다면 난이도 낮추기도 가능합니다.
길가의 숨은 마법
메인 루트에서 벗어나 지독히 미로 같은 던전 끝에 숨어 있는 디테일들이 여행을 모험으로 끌어올립니다. 퀘스트를 전하는 창백한 몬스터, 시간·공간 밖에 떠 있는 애절한 저택, 폭발하는 인형으로 에어하키를 하거나 조작감과 안 맞는 파쿠르에 혈압 오르는 해변 미니게임, 지도를 뒤덮을 만큼 거대하게 포효하는 선택형 ‘메가 보스’….
‘나중에 꼭 다시 할 것’이라는 메모를 너무 자주 남기게 되는데, 정작 게임 안에 그런 표시 기능이 없어서 당황스럽더군요.

가장 깊은 울림은 스토리 본줄기 밖, 작가들이 던지는 질문에서 자주 피어납니다. ‘언제든 널 희생시킬 사회에 우리가 얼마나 빚졌을까?’, ‘곧 가무아주(Gommage)로 떠날 사람을 다른 사고로 먼저 잃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부모는 아이에게 언제부터 죽음을 준비시켜야 할까?’, ‘어느 시점에 도시 전체가 아이 낳기를 포기할까?’…
게임은 어떤 이슈에 대해 쉽게 재단하지 않습니다. 꺼져 가는 빛 아래 몸부림치는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죠.
“포옹 좀 해도 될까?”
제니퍼 잉글리시(Jennifer English)를 비롯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는, 표정 애니메이션에 아낀 예산을 충분히 만회합니다. 다만 특유의 엉뚱한 유머는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어요—저는 좋았습니다.

예컨대 벤 스타(Ben Starr)가 연기한 무뚝뚝한 베르소(Verso)는 비극적 장면 뒤 풍선 멍청이 에스키에(Esquie)가 “포옹할래?” 세 번 묻자 세 번째에 “응, 포옹하고 싶어”라고 답합니다. ‘다음에 팔 하나로 포옹하게 해주지!’ 같은 뻔한 농담 없이 그냥 친구 품에 안기고 싶다는 거죠. 참 다정합니다.

음악은 《파이널 판타지 X》와 《니어: 오토마타》 사이 어딘가—웅장하고, 장난스럽고, 달콤하고, 애잔하며 때론 재즈·일렉·카니발 풍까지 넘나듭니다. 책 읽듯 동화적인데 유치하지 않고, 진지하지만 잘난 척은 없으며(조금은 심오한 척할지 몰라도), 세련된 냉소 대신 천진난만을 택합니다. 어둡지만 추하지 않죠.
‘공허한 스펙터클’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데, 이건 가슴이 꽉 찬 스펙터클입니다. 부끄러움 없이 마음껏 뿜어내는, 다 큰 아이들의 ‘소꿉놀이’ 같아요. 무엇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진심이 느껴집니다. 큰 스튜디오라면 지워버렸을 이상하지만 진심어린 붓 터치들을 그대로 남겨 둔 듯합니다.
가끔, 열 살로 돌아가게 하는 RPG가 있습니다. 《리버스(Rebirth)》, 《크리스 테일즈(Cris Tales)》, 《수이코덴(Suikoden)》을 다시 붙잡을 때처럼요. 하지만 보통은 세월이 흐르며 마법 같은 설렘 대신 편안한 감상이 자리하고, ‘이 셔츠 중고가 얼마일까’ 같은 어른의 계산이 끼어들죠.
<33 원정대>가 모두에게 그런 마법을 건네진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확실히 그랬어요. 아직도 이 세계를 떠날 준비가 안 됐습니다. 누군가가 아파 가며 꼭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정말 특별하고 드문 경험이었습니다.

위의 제 <33 원정대> 리뷰를 읽어보셨다면, 제가 이 게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미 아실 겁니다. 현재까지 제가 꼽은 올해의 게임이기도 하고, 제 인생에서 손꼽히는 RPG이기도 해요. 정말 놀라운 마법이 담긴 작품이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죠.
그런데 요즘 분위기를 보면, 이 뛰어난 완성도가 전체 게임 개발 업계의 현주소를 비판하는 무기로 자주 쓰이고 있더라고요. 심지어 축하하고 감탄하는 자리에도 “고작 30명의 개발자”이라는 식의 문구가 따라붙곤 합니다.
대단한 결과물에 감명받는 건 당연해요!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그리고 저도 게임 개발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비대해졌다는 데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다만 이 기믹은 맛깔나지만, 숫자 계산은 조금 엉성해요. 제 말을 굳이 들으실 필요도 없습니다. 크레딧이야 금방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간단히 말씀드리면 개발사 샌드폴의 내부 인원은 실제로 30명 남짓입니다. 제가 세어 보니 34명 정도였지만, 그중 몇 분은 시나리오·퀘스트 디자인처럼 두 가지 역할을 겸하고 있더군요. 정말 놀라운 규모죠. 다만 본격적인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먼저, 한국인 8명으로 구성된 ‘게임플레이 애니메이션’ 팀이 있습니다. 이 게임을 해보셨다면 전투에서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실 거예요. 몬스터들이 필드에서 회심의 페인트 모션과 콤보를 펼치고, 플레이어는 이를 패리하거나 회피해야 하죠.
‘게임플레이 애니메이션’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샌드폴 내부 표기를 보면 유사한 분야가 ‘시네마틱·퍼포먼스 캡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한국 팀이 전투의 재미와, 나아가 게임의 개성을 크게 책임졌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네요.
여기에 현지화·QA·보이스 프로덕션에 참여한 수십 명, 그리고 30명 넘는 음악가들—9인조 합창단까지—가 더해집니다. 샌드폴의 내부 크레딧상 음악 파트는 수석 작곡가 로리앙 테스타르(Lorien Testard), 보컬 3명, 그리고 오디오·뮤직 리드 디자이너만 적혀 있어요.
물론 샌드폴이나 누구든 인재를 숨긴다거나 과장을 한다는 얘기는 전혀 아닙니다. <33 원정대>라는 작품의 본질을 이루는 음악만 따져 봐도, ‘30명’ 서사는 사실상 두 배로 늘어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예요.
이 모든 이야기는 영미권 보도에서 동아시아 등 외주·지원 스튜디오의 기여를 축소하는 경향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산업이 선호하는 서사를 그대로 따르는 셈이죠.
몇 년 전 People Make Games는 AAA 업계가 ‘해외로 크런치를 수출한다’는 관행을 보도한 바 있습니다. 물론 샌드폴이 그러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오히려 정반대의 증거가 많아요. 많은 경우 뉴스 작성자들이 마감에 쫓겨 이미 굳어진 문구를 반복할 뿐이죠. 그래서 이런 ‘그럴듯한’ 주장이 빠르게 퍼지는 건 이해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는 설령 개발자 500명이 만들었다 해도 여전히 놀라운 작품입니다. 좋은 게임의 향기가 가득하고, 사랑과 영감,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탄생한 게 분명하니까요.
인력과 자원을 숫자로 곱셈·나눗셈하는 건 예술을 평가하는 데 정말 지루한 방식이죠. 하지만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옳은 일을 칭송하면, 저는 늘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져요. 그러니, 크레딧은 꼭 끝까지 보세요.
- 원문: 록페이퍼샷건 https://www.rockpapershotgun.com/clair-obscur-expedition-33-review / https://www.rockpapershotgun.com/no-clair-obscur-expedition-33-wasnt-made-by-30-people
- 번역: o3 / 편집: 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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