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로 행복한 나라에서 보낸, 가장 행복하지 않았던 일주일(번역)

*뉴욕타임즈의 책 평론가 몰리 영의 글

“2월에 핀란드 헬싱키에 오는 건, 음, 객관적으로 이상한 선택이에요.” 헬싱키에서 만난, 미코 티로넨 씨가 말했습니다. “이맘때의 핀란드엔….” 그는 잠시 말을 멈췄습니다. “…색이라는게 없거든요.”

저는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헬싱키로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웹 개발자이자 작가라는 티로넨 씨와 한 커피숍에 앉아 있었습니다.

2012년에 시작된 다소 특이한 UN 프로젝트 ‘세계 행복 보고서’에서 핀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에 8년 연속으로 선정되었습니다.

핀란드가 이 순위에서 1위에 오르자 곧바로 정부는 ‘행복 관광’을 추진했고, 채집·맑은 공기·숲·호수·친환경 식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우나 같은 문화 요소들을 체험하는 여행 코스를 제공합니다.

저는 이런 여행 코스를 따르거나 가장 화창한 시기(혹한기를 제외한 계절)에 핀란드를 찾는 대신, 현지인 티로넨 씨를 당황하게 만들 만큼, 아무 계획도 없이 가장 우울한 달 중 한 달에 일단 찾아왔습니다.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가장 어두운 시기에도 과연 여전히 그렇게 행복할까요?



아이들이 어둠 속에서 노는 나라

티로넨 씨에게 제가 이런 의도를 설명하자, 그는 핀란드 작가 유카 비킬라의 말을 떠올렸다고 했습니다. “핀란드는 아이들이 어둠 속에서 노는 나라다.”

비유이자 팩트이기도 한 이 말처럼, (북반구 끝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핀란드 아이들은 실제로 어둠 속에서 많이 뛰놉니다.

아이들은 차량에 치이지 않도록 헤이야스틴(heijastin)이라 부르는 일종의 반사판 역할을 하는 액세서리를 외투에 달고 다니는데, 레몬·푸들·백조·고슴도치·축구공 등 모양도 다양합니다. 헤이야스틴은 어른들도 착용합니다.

“헤이야스틴(반사판) 없이 밖에 나간다고 하면 너 사고나려고 일부러 그러는거지? 하는 농담을 할 정도에요.” 티로넨 씨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사고가 나면, 진짜 사고죠.”

우리는 모두 작은 커피 잔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핀란드에선 이런 잔이 일반적입니다. 커피를 충분히 마시고 싶으면 끊임없이 리필을 받아야 하죠. 그는 커피잔을 비우며 한마디 보탰습니다. “물론 제 파트너는 이 농담을 좋아하지 않지만요.”


제 행복 실험은 시작부터 좋지 않았습니다. 전날 일요일 오후, 잔기침과 가래 소리로 진동하는 가득 찬 비행기 — 세균 캡슐 같은 곳 — 를 타고 도착했기 때문이었죠.

첫날 아침은 감기와 시차로 시작했습니다. 옷을 챙겨 입고 얼어붙은 것만 같던 작은 호텔방을 나와 저가 할인마트에서 이 지역 대표 간식인 짠 감초를 샀습니다. 헬싱키는 안개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10미터 정도만 겨우 보였고, 그 너머는 진주빛 장막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티로넨 씨와 커피를 마신 뒤 저는 근처 항구로 저녁 산책을 나갔습니다. 얼음 사이로 검은 바닷물이 반짝였습니다. 낮에 연어 수프와 핫도그를 팔고 있던 노점들은 문을 닫은 상태였습니다. 춥고 황량했습니다. 움츠러든 가족들은 붙어 걸으며 어둑한 식당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헬싱키의 유명한 에스플라나디esplanadi 공원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봄이면 꽃이 만발하고 사람들로 붐빈다더니만, 지금은 노점은 닫혀있고 나무는 앙상했습니다. 눈은 치워져 있긴 했지만 길가엔 인적이 드물었죠.


“겨울의 핀란드엔, 색이 없어요”

바에 들러 한 잔 했습니다만, 술은 마시는 이의 기분을 더욱 증폭시킨다는 걸 잘 알죠. 더 기분이 쳐졌습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티로넨 씨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의 아파트 앞에는 흙과 자갈이 뒤섞여 더럽고 보기 흉한 눈더미가 있는데, 저에게 ‘핀란드에 온 걸 환영합니다!’라는 자조적 선물로 그 눈더미 사진을 보내 줄까 했다는 겁니다.



행복의 사다리

행복을 측정하는 데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수천 년의 사색, 공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벤담·이스터린·오프라 윈프리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행복을 정의해내지 못했습니다.

행복은 쾌락의 양일까요? 고통의 부재일까요? 목적·희망·공동체 의식일까요? 건강·부·소득과는 어떤 관계일까요? 기분일까요? 그저 신경전달물질일 뿐일까요?

첫 번째 ‘세계 행복 보고서’는 170쪽짜리 PDF로, 국가별 행복 순위를 차트로 제시했습니다. 1위 덴마크, 2위 핀란드, 3위 노르웨이. 미국은 11위였습니다. 그 이후로 매년 새 보고서가 나오고 있죠.

이 순위는 단 한 가지 질문, 엄청나게 — 미친 듯이 — 많은 것을 함의하는 질문을 따라갑니다. 그 질문이 바로 ‘캔트릴 사다리(Cantril Ladder)’입니다:

0부터 10까지 번호가 매겨진 사다리를 상상해 보십시오. 10은 당신에게 가능한 최고의 삶, 0은 최악의 삶을 의미합니다. 지금 당신은 몇 번째 단에 서 있다고 느끼십니까?

저처럼 질문을 보자마자 실제로 사다리를 그려 번호를 메긴다면, 0을 아래 공간으로 봐서 11단 사다리가 되어버립니다. 이 사다리를 고안한 심리학자 해들리 캔트릴 박사는 1965년 제안 당시 사다리 그림을 포함했는데, 0은 단이 아니라 최하단 밑 공간입니다.

매년 갤럽 조사원들은 나라별로 약 1,000명에게 전화나 대면 인터뷰를 통해 이 질문을 던집니다. 세계 행복 보고서 작성자들은 그 답변을 최근 2년치와 합쳐 약 3,000명의 표본을 만듭니다.


북유럽 국가들은 꾸준히 상위권을 차지합니다. 핀란드는 8년 연속 1위, 덴마크·아이슬란드·스웨덴·노르웨이도 늘 Top 10에 들죠. 반면 가장 비참한 나라는 빈곤·분쟁·부패·인권 침해에 시달리는 곳들 — 아프가니스탄·콩고민주공화국·예멘·아이티 등 — 입니다.

이는 국가들의 운명을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죠. 폴란드와 포르투갈은 조사 시작 이래 딱 한 단계 상승했습니다. 미국은 2012년 11위로 정점을 찍고 꾸준히 하락 중입니다.

올해 3월 중순, 2025년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260쪽으로 역대 최장, 데이터로 가득했죠. 미국은 작년보다 한 단계 떨어져 24위, 핀란드는 1위를 유지했습니다. 언론들은 각자 열을 올리며 이 보고서를 다뤘습니다.

핀란드에서는 커피를 작은 잔에 마시는 게 불문율입니다.

보고서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이를테면, 이탈리아(40위)가 엘살바도르(37위)보다 덜 행복하다거나, 사우디아라비아(32위)가 프랑스(33위)보다 더 행복하다거나, 이스라엘이 Top 10에 들었다거나, ‘국민총행복지수(GNH)’로 유명한 부탄이 2019년 95위로 반짝 이름을 올렸지만 그 뒤 리스트에서 사라졌다는 사실, 예상하셨나요?

또 숫자를 보시면, 핀란드의 현재 점수는 7.736, 미국은 6.724입니다. 사다리 한 칸 정도 차이죠. 다시 말해, 미국인은 핀란드인의 87%만큼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미국 독자들이 주목하는 건, 우리가 이 게임에서는 (다른 게임들과 달리) 1위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멕시코(10위)와 캐나다(18위) 같은 이웃 나라에게 뒤처진다는 점입니다. 매년 나오는 이 보고서는 미국의 순위가 리투아니아·슬로베니아·UAE 밑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행복을 게임처럼 접근하는) 미국인의 방식이 유별나게 느껴진다면, ‘행복’을 신비로이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례 여행을 떠나거나 하버드·예일 강좌(두 대학 모두 행복 수업을 개설한 적이 있습니다)를 통해 깨달아야하는 개인의 과업으로 여기는 것이죠.

세금·건강보험·자기방어 같은 문제처럼, 행복도 (개인이 알아서)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죠.

아메리칸 드림, 커다란 자유가 있는 나라, 커피 잔도 땅덩이 만큼이나 큰 나라에서 우리는 억만장자가 되거나 길거리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자유’를 누립니다. 미국 안에서 이 행복 사다리는 끝과 끝 사이가 그 자유 만큼이나 넓습니다.



핀란드 사우나

핀란드의 모든 공공 건물에는 사우나가 있습니다. 핀란드에는 전국적으로 인구 두 명당 하나꼴로 있습니다. 당연히 ‘행복 관광’ 문헌에서도 핀란드는 사우나에 진심입니다. 너무 하다 싶을 정도로요.

핀란드어에는 사우나 후 찾아오는 황홀한 노곤함을 뜻하는 단어 ‘사우난 얠케이넨 라우케우스(saunan jälkeinen raukeus)’, 사우나 벽과 난방 시설 사이에 산다는 요정을 일컫는 ‘사우나톤투(Saunatonttu)’라는 단어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사우나의 문을 쾅 닫으면 사우나톤투가 화를 낸다죠.

둘째 날, 로율뤼(Löyly)라는 사우나에 갔습니다. 수영복 착용(핀란드에선 드뭅니다), 26유로 입장료(아 비싸요), 건축미(감탄사가 절로!) — 전형적인 가정식 사우나는 아니었습니다.

소나무 판자를 각진 면으로 겹겹이 쌓아 바위 더미처럼 보이는 건물 끝엔 험준한 테라스가 있고, 테라스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누군가 얼음 층을 둥글게 파서 겨울바다에 몸을 담글 수 있게 해뒀습니다. 겨울바다에 몸을 담그는 것도 단어가 있습니다. (핀란드 유튜브 인플루언서들에게서 배운) 아반토우인티(avantouinti)입니다.

로율뤼 사우나의 아반토우인티. 겨울에도 발트해에 들어갑니다.

저는 사우나 안팎에서 바다 입수객들을 지켜보았습니다. 결국 저도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두 시간을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망치게 될 테니까요.

밤 공기는 섭씨 0도, 바다 온도는 모르지만 사우나가 파낸 구멍 빼고는 온통 얼음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저 없이 뛰어들어 20~30초 물장구치며 웃고는 숨을 헐떡였고, 어떤 이들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사다리로 엉금엉금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며 저는 뇌를 꺼버리고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벼락 맞은 듯 입안에 씁쓸함이 닥쳐왔고, 온 몸의 세포가 헤쳐모여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저 데크 끝에서 누군가 박수를 쳤습니다. 그 한 번의 응원이 부심을 부풀려 저는 몇 초 정도 떠 있다가 사다리를 올라왔습니다.

올라오며 내려가는 남자 한 명과 스쳐가며 서로 크게 웃었습니다 — 무의미한 승리를 막 끝낸 사람, 이제 막 시작하려는 사람. 그가 잠수하는 걸 보고 저도 크게 박수를 한번 쳐주고는 뜨거운 사우나로 달려갔습니다. 피부가 완전히 제 몸과 분리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마틴 에이미스의 소설 《런던 필즈》에는 “우리는 모두 한밤 중에 시인 또는 아기 같은 내면의 존재와 싸운다”는 대사가 있는데, 얼어붙은 바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기에 사우나의 열기로 뼛속까지 데워지면 뜨거웠다 차가웠다, 다시 뜨거웠다 차가웠다를 반복하며 번뜩이는 감각으로 가득해집니다.

핀란드에는 인구 두명 당 하나의 사우나가 있습니다. 행복 관광에서 사우나가 강조되는게 이상하지 않죠.

다음 날은 코티하르윤(Kotiharjun)이라는 더 전형적인 사우나를 찾았습니다. 빨간 네온 간판, 밖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 두 개— 하나는 비어 있고 다른 하나엔 수건 두른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열기를 뿜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음료를 넣어두는 공용 냉장고가 있었습니다. 직원은 제게 16유로를 받고 삐걱거리는 계단 위 여자 탈의실을 가리켰습니다. 친구는 여기가 바로 “핀란드를 대표하는 장면(scene)”이라 했죠.

정말 그랬습니다, 조용하지만: 막 사우나를 다녀왔거나 곧 갈 열두 명의 여성들이 버건디색 커튼이 달린 창가 목재 사물함에서 물건을 뒤적이며 낮은 목소리로 대화했고, 탁자·보드게임·가짜 난초·《사우나》 잡지와 대형 손 소독제 통이 있었습니다.

코티하르윤은 세차장이나 세탁소 같은 생활감과 빛바랜 매력을 풍겼습니다. 외국인이나 관광객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우나 에티켓” 안내판이 탈의실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입장 전 씻기, 수분 보충, 향수 금지, 큰 소리 대화 금지, 누가 오래 버티나 경쟁 금지, 잎사귀 묶음으로 자신과 타인을 휘두르는 건 좋음 등.

해외에도 널리 알려진 보통의 핀란드 사우나와 달리, 반짝이 키링 헤이야스틴heijastin이나 진짜 사우나 코티하르윤Kotiharjun 같은 보물은 핀란드 바깥에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미국에도 사우나 팬은 많습니다. 조 로건·르브론 제임스·레이디 가가 같은 유명 인사도요. 겨울 바다 입수 아반토우인티Avantouinti는 ‘바이탈리스트’ 라이프스타일 팬과 피트니스 애호가 사이에서 유행인데, 미국에서는 보통 차고에서 혼자 냉수욕하며 챌린지 영상을 찍죠.

지금 우리에게 결여된건 그 외형이 아니라 사우나 문화, 우리를 완전히 하나로 묶는 어떤 문화일지도 모릅니다.

한 예술가는 자신의 여름 별장에서 온수도, 샤워 시설도 없지만 “사우나는 당연히 있죠.”라고 했습니다. 관광청 공무원은 “저는 자주 가는 편은 아니에요, 주 2회 정도?”라면서도 “집에 사우나 없으면 건물에 꼭 하나 있죠.”라고 했습니다.

저를 태워줬던 택시기사 카람은 “아파트에 개인 사우나 있어요. 피곤하거나 몸이 쑤시면 써요. 그러니까 매일이죠. 하하!”라고 했습니다.

핀란드에서 사우나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것이 부를 주거나 외모를 바꾸거나 집중력을 높이지 않습니다. ‘독소’를 땀으로 배출하려는 것도 아니죠(그럴 수도 있겠지만, 저는 과학자가 아니라서요).

핵심은 그 사우나 행위 자체에요. 가족·친구·낯선 이와 벌거벗은 평온 속에 앉아, 자연이 요구하고 또 강화해 주는 뼛속 깊은 신뢰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두 가지 행복

UN 행복 연구의 첫 보고서는 연구를 요약하며 두 가지 개념을 구분했습니다: ‘정서적 행복(affective)’과 ‘평가적 행복(evaluative)’.

정서적 행복은 순간의 감정을, 평가적 행복은 삶 전반에 대한 이성적 평가를 나타냅니다. 웃음·파티·섹스는 정서적 영역, 건강·소득·사회적 결속·안전은 평가적 영역이죠.

조악한 유의어지만, 평가적 행복은 대략 ‘삶의 충만감’쯤으로 볼 수 있습니다. 캔트릴 사다리가 주로 측정하는 것도 이것이며, 예상하듯 북유럽 국가들은 높은 기대수명·재분배적 세제·기능적 정부·낮은 부패·공유된 규범 덕에 상위권입니다.

핀란드를 여행으로 찾는 관광객이 기대하는 행복은 주로 감각과 관련한 정서적 행복입니다. 정작 핀란드가 보유한다고 평가받는 평가적 행복과 종류가 다릅니다.

두 행복 사이 또 다른 혼선은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두 가지의 행복을 섞어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이를 낳는 여성은 극심한 진통(낮은 정서적 행복)을 겪으면서도 깊은 충만감(높은 평가적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는 훈장을 보면, 우리는 핀란드가 무한히 환희에 가득한 축제의 국가인 것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본 2월의 핀란드는 훨씬 소박했습니다. (오히려 정서적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죠.)

어느 날 저는 트롤리를 타고 눈을 감아봤습니다. 졸리기도 했지만 핀란드어를 듣고 싶어서였죠. 핀란드어는 핀우그리아어족으로 헝가리어·에스토니아어와 친척입니다.

제 귀의 핀란드어는 물결치는 소리 같았습니다. 파도가 부딪치고 물방울이 종유석을 타고 흐르는 듯했죠. 나라에 물이 많아서일 수도, 억양 패턴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단어 첫 음절에 강세가 있어 말발굽 소리처럼 규칙적이기도 했습니다.



오오디 도서관의 신뢰자본

시내 중심에서 내려, 케이크로 만든 배 같은 헬싱키 중앙 도서관 ‘오오디(Oodi)’에 갔습니다. 2018년 개관 전 공모에서 2,600개 후보 중 뽑힌 이름으로, 짧고 발음하기 쉬우며 특정 인물 헌정이 아닌 이름을 찾았다 합니다. 핀란드어로 ‘오드(ode, 송시)’입니다.

거대한 배와 같은 건물에서 방문객은 뱃머리를 통해 들어갑니다. 아이젠도 벗어야 하죠. 제가 방문한 아침, 사람은 많았습니다만 굉장히 조용했습니다.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쓴 것 같은 느낌이었죠.

“안녕하세요” 직원이 인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답했습니다. “표는 얼마인가요?”

“네?”

“입장권을 사야 하지 않나요?”

“하하하,” 직원이 웃었습니다. “아니요. 그런건 없어요.”

하하. 그렇죠 당연히 공공 도서관은 표가 필요 없죠. 건물이 너무 화려하고 멋져서 당연히 입장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괜히 부러워서 우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오디는 레스토랑·어린이 놀이 공간·음악 스튜디오·함께 요리할 수 있는 부엌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1층엔 영화관, 비트 라자냐·당근 수프를 파는 카페테리아, 창가에서 체스를 두는 아이 스무명 남짓이 있었습니다. 2층엔 3D 프린터·레이저 커터·대형 프린터·조각 기계·회의실·흔들의자가 있었고, 훌륭한 기타·드럼 세트·치터까지 대여 가능했습니다. 팟캐스트 스튜디오·전자 음악 스튜디오·교실·친구들과 요리할 부엌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매력적이었지만 저를 멈춰세운 것은 그 표지판이었습니다.

뉴욕의 브루클린 도서관엔 “조용히 해 주세요”가 붙어 있는데, 오오디에선 “다른 사람들이 평화롭게 일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그 의미는 다릅니다.

브루클린 표어는 개인의 절제를 요구하고, 핀란드 표어는 타인의 존재를 인정해 달라는 요청이죠. 그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꼭대기층에는 책·게임·악보(그리그와 야니를 포함한)가 있고, 카페엔 연어 수프·핑크 돔 프린세스 케이크가 있었고 모든 테이블에는 생화가 있는 유리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실내에는 부시다(Bucida buceras) 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곡선 유리벽 너머로는 국회의사당이 보였습니다. 오오디 발코니는 의사당 입구와 같은 높이로 설계되었습니다. “민주주의와 대화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양말만 신은 아이들이 흰색 전나무 바닥 경사를 언덕 굴러가듯 구르고 있었습니다. (미국 대도시 공립 도서관 바닥을 상상해보세요. 아이들이 구를 수 있을만큼 깨끗할까요.) 물결치는 천장 아래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저는 다시 부러움에 우울해졌습니다.

오오디 도서관은 헬싱키 사람들이 공유하는 큰 거실 같은 곳입니다.

이곳에는 단순하면서도 쉬이 상상하기 힘든,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제 어릴 적 자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공립 도서관에 들어갔더니 누군가 이렇게 비꼬는 걸 들었거든요. “노숙자 쉼터인데 책이 많네.”

오오디도 물론 이런 쉼터 기능도 합니다. 짐을 잔뜩 가진 사람들이 추위를 피해 이 곳에 머물렀죠. 누가 뭐라 하지 않았습다. 그들은 특정 구역에 몰려있지도 않았고, 사람들을 피하지도 괴롭히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그곳에 있었죠.

핀란드인의 ‘행복 사다리 0단’이 그정도라서, 사다리 꼭대기의 높이가 높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요? (역주: 핀란드인이 될 수 있는 ‘가장 불행한’ 모습이 저 정도로 높기 때문에, 가장 행복한 모습이 (미국의) 그것보다 덜해도 괜찮은걸까요)

‘우리에게 없는 건 엘론 머스크, 또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조차 없다’는 사실이 행복 사다리에서 한 칸 위로 올려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에 대해 친구와 문자하다 제가 정말 우울해졌다고 털어놨습니다. 친구는 전화를 걸어 결국 제가 받게 했습니다. 좋은 친구란 그런 거죠.

저는 오오디 도서관에서 제가 본 것들, 벽화 그리기 활동, 발 마사지를 하는 엄마들, 한 엄마가 9개월 남짓된 아기를 하이체어에 앉혀 야채 퓌레를 주다가 책을 빌리러 (아이를 그대로 둔 채) 자리를 비운 20분간의 안전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엄마가 아이에게 돌아오자 미소를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전 뉴욕에서 왔어요.” 제가 말했습니다. “저도 당신 아기랑 비슷한 또래 딸이 있어요.”

“아, 아직 뉴욕은 못 가봤네요. 가보고 싶어요.”

우리는 아이·도서관·국가별 안전에 대해 이야기 나눴습니다.

“몇 년에 한 번쯤 아기를 잃어버리는 소동이 있기는 해요. 하지만 보통 15분 내에 찾거나 돌아와요. 심각한 일은, 음 없죠.” 그 엄마가 말했습니다. 아기는 퓌레를 다 먹고 저와 작별 인사를 나눴습니다.



행복에 집착하지 않는 행복

여행은 고향을 낯설게 만듭니다. 헬싱키를 보니 제가 뉴욕에서 짜증내던 행동들이 이기심·냉소라는 범주로 뭉쳐 보였습니다: 쓰레기 아무데나 버리기, 지하철 문 가로막고 서있기, 주차칸 두 칸 차지하기, 유모차 끌고 계단 오르는 엄마 못 본 체하기 등.

사람들이 반사회적으로 구는 이유는 복잡하겠죠. 저는 일주일 동안 핀란드 사람들이 왜 작은 커피 잔을 고집하고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지 않고 줄을 새치기하지 않는지, 왜 거리에 개 배설물 하나 안 보이는지(다섯 중 한 명은 개를 키운다는데!), 왜 차도 없는 횡단보도에 신호등이 빨간불이면 멈추어 기다리는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전화로 친구에게 계속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우리 딸은 도서관에서 혼자 채소를 먹지도 못하고, 실내의 부시다 나무 아래 북극광 벽화도 못 그릴 거야.” 친구는 “맞아. 하지만 미국보다 나쁜 곳도 많잖아.” 하고 말했습니다.

친구가 옳았습니다. 루마니아·코소보·에스토니아 같은 나라들 — 적어도 세계 행복 보고서에 따르면—이 있으니까요. 일주일간 제가 오히려 (너무 미국인답게) 캔트릴 사다리에 집착하며 균형 감각이 흐려졌던 겁니다.


다음 날, 핀에어 비행기를 타고 저는 지구에서 가장 삶에 충만한 나라를 떠났습니다. 비행기는 꿀렁거리며 이륙했습니다.

뉴욕에서 절 기다리는 건? 일단 공항 택시 줄 — 인류애의 바닥을 보여 주죠. 그다음엔 울퉁불퉁한 도로, 숨막히는 교통체증, 바닥에 구멍 난 아파트, 병원비, 보육비.. 그래도 뉴욕의 커피잔 하난 크긴 하죠.

모든 여행은 ‘행복을 찾아서’ 시작합니다 — 가족 여행·출장·도피가 아니라면요 — 설령 끝내 우울한 자기 성찰로 변질된다 해도 말이죠.

미코 티로넨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캔트릴 사다리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후 만난 모든 핀란드인처럼 그는 전제를 거부했습니다.

“네? 그걸 어떻게 알아요?” 티로넨 씨가 말했습니다.

“살아보는 건 한 번뿐인데요.” 이들에게는 사다리도, 꼭대기도, 밑바닥도 없습니다.

“어둠이 있었고, 지금 뭔가 일어나고 있어 혼란스럽고, 뭐 다시 어둠이 오겠죠.”

몰리 영은 뉴욕 타임즈와 타임즈 매거진의 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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