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시형 독서’라는 기묘한 트렌드 (번역)

보여주기식 독서, 사람들이 허세라고 부르는 새로운 방식일까, 아니면 활자의 위상이 그만큼 추락했음을 보여주는 걸까?

상상을 하나 해보자. 한 남자가 바(bar)에 걸어 들어와 술을 한 잔 시키더니,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의 소설 <무한한 재미(Infinite Jest)>를 꺼내 읽기 시작한다. 굳이 <모비 딕>이나 <중력의 무지개>, <미들마치>일 수도 있었겠지만, 상황 설명을 위해 월러스의 이 1996년작 소설이라고 해두자.

그래, 1,000페이지가 넘는 벽돌 같은 분량에 수백 개의 각주가 달려 있고, “이 소설 플롯이 시간 순서대로 안 가는 건 알고 보는 거지?”라고 속삭이는 안경 쓴 대학원생 백만 명의 유령이 떠도는 바로 그 책 말이다.

온라인 세상에 푹 절여진 이들에게 이 남자는 단순히 낯선 사람들 틈에서 좋은 책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최근 기묘한 악명을 얻고 있는 이른바 ‘과시형(보여주기식) 독서’라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시형 독서가는 책을 패션 액세서리처럼 취급한다.

이들은 연애 상대를 꼬시려는 미끼로, 혹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뽕에 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거운 벽돌책을 끙끙대며 들고 다닌다. 다른 모든 사람이 소셜 미디어를 스크롤 하거나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으로 삶을 차단해버릴 때, 과시형 독서가는 대문자 ‘B’로 시작하는 거창한, 말 그대로 ‘책’다운 책을 도구 삼아 자신을 봐달라고 애원하며, 관심받고 싶어 안달난 자신의 지성을 전시한다.

사회적 현실, 특히 누군가의 독서 생활을 이런 식으로 평가하는 태도는 어리석거나 심지어 미친 짓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과시형 독서라는 개념은 대중의 머릿속에 확고히 자리 잡았고, 여러모로 책을 그리 많이 읽지 않는 세대에게 하나의 밈(meme)이 되었다.

틱톡과 인스타그램 사용자들은 종종 과시형 독서가의 허세를 비꼬는 숏폼 영상을 올리는데, 그 대상은 주로 남성이다. 헐렁한 스웨터 조끼를 입고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며 양장본 두 권을 동시에 읽는 20대 남자, 카페에서 스카프를 두른 채 책을 거꾸로 들고 읽는 남자, 야외 테라스에 앉아 자신이 텍스트에 밑줄 긋는 모습을 누가 지켜보는지 힐끔거리는 남자 같은 식이다.

이와 비슷하게 엑스(X, 구 트위터)에서는 과시형 독서라는 ‘기믹’이 더 진지한 욕구를 감추는 가면이 되기도 한다. 즉, 농담에 동참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책에 대한 자신의 ‘찐’ 열정을 공유하려는 욕구 말이다. (난해한 책을 읽는 사진을 올리며 선수 치듯 “나 지금 과시형 독서 중”이라는 캡션을 다는 사용자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포스트들은 인플루언서나 연예인들이 실물 책을 자신의 취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쓰려는 방식과 묘하게 대조를 이룬다. 그들은 심지어 휴가지 사진이나 SNS 게시물용 소설을 골라주고 자택 서재를 꾸며주며 유명 브랜드의 북클럽을 운영해 줄 ‘북 스타일리스트’를 고용하기도 한다.

과시형 독서가 이상한 현상으로 떠오른 이유는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수상해서가 아니다. 책 읽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자신을 마케팅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저 관심 받고 싶은 찌질한 욕구보다, 사람들 앞에 어려운 책을 읽는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훨씬 더 깊고 넓은 사람임을 세상에 보여주려는 행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삶이 온통 ‘보여주기’냐 아니냐 혐의를 다루는 지뢰밭이 되었을까? 행동주의가 있으면 ‘과시형 행동주의’가 있고, 남성성이 있으면 ‘과시형 남성성’이, 긍정주의가 있으면 ‘과시형 긍정주의’가 있다. 예시는 지겨울 정도로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 신조어들은 현대의 현상을 진단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존재하던 문화적 실체를 조명하는 것일까? 만약 인간의 모든 활동을 ‘진짜’와 ‘연기’라는 스펙트럼 위에서 측정할 수 있다면, 진짜와 가짜를 걸러내는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걸 그냥 딱 보면 ‘아는’ 것일까? 그리고 왜 우리가 그걸 신경 써야 하는가?

현대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문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진정성(authentic)’이다. ‘폼 잡는 꾼(poseur)’이나 ‘짝퉁(phony)’—즉, 존재(is)하기보다 척(affect)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자기 수양에 관한 불문율을 거스르는 일이다.

스케이트보드 파크에서 장비는 ‘풀셋’으로 맞췄지만 용어는 하나도 모르는 사람, 콘서트장에서 노래 가사를 전혀 모르는 팬, 혹은 더 최악의 경우, 웃긴 문구가 적힌 시위용 손피켓을 만드는 데는 몇 시간을 쓰면서 정작 자기 지역구 의원 이름조차 모르는 정치 참여자로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다.

만약 우리의 진정성이 의심받는다면—우리가 척하고 연기하는 것을 들킨다면—우리에게 발 디딜 곳이 남아 있기는 할까? 우리가 ‘가짜’라고 판명된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지지하고 옹호할 수 있겠는가?

반대로, 모든 것이 잠재적으로 ‘연기’라면, 우리는 어떻게 정상 범주(sphere of normal) 밖으로 나아가 진지하고 오그라드는(cringe) 위험을 무릅쓰며 무언가 변화를 일으키는 경험을 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인격의 수행이 오늘날처럼 감시탑 아래 훤히 들여다보이고, 사람들이 서로 감시하는 대상이 된 적도 유사상 없을 것이다. 소셜 미디어는 온라인 페르소나를 ‘진정성있게’ 깐깐하게 관리하고 모니터링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며, 정체성 구축이 사용자 경험의 핵심이 되는 공간을 만든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자신을 ‘진정성 있게’ 표현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즉흥적이고 리허설 없는 인간적 표현이 가능할 뿐 아니라 필연적인 오프라인 현실과 달리, 온라인의 삶은 끊임없이 그 자체가 ‘만들어진 것’임을 상기시킨다.

게시물을 올린다는 것은 계산하고, 재고, 조작한다는 뜻이다. 게시자가 이 역학을 인지하든 못 하든, ‘연기(performance)’는 그 경험 안에 내장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소셜 미디어에서 타협 없는 진지한 콘텐츠가 좀처럼 먹히지 않는 이유다.

게시물을 올리는 행위만으로도 이미 자신이 이미지에 신경 쓰고 있으며 허영심이 있다는 걸 드러낸다는 사실을 게시자는 모르는 걸까?

2010년대 중반, “도덕적 우월감(virtue signalling)”이 그토록 뜨거운 논란이 되었던 주된 이유는 정치적 이슈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연대감을 ‘과시’하는 것이 저속하기 때문이 아니다. 소셜 미디어 사용의 전반적인 룰이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 사진을 올리거나, 세계 여성의 날에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인스타그램 캡션에 쓰는 것은 더 이상 ‘국룰’이 아니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아이러니가 빠진 ‘페르소나 중심’의 모든 콘텐츠는 ‘연기하는거 아냐?’라는 어떤 의심의 공론장에 입장하게 되었다.

요즘 사용자들은 본인이 어떤 식으로든 그 과시를 인지하고 있다는 ‘메타적 자각’을 콘텐츠에 밑밥으로 깔면서 과시형이라 낙인찍히는 것을 피한다. 하지만 서비스들이 아무리 자신들이 ‘진정성을 표현하는 장’이라고 주장한들, 소셜 미디어에서 ‘과시적’이라는 유령을 완전히 무시하기란 여전히 불가능하다.

(믿거나 말거나, 인스타그램의 미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물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 주장하고, 틱톡은 자사 플랫폼이 사용자들이 “창의성을 발휘하고 진짜(authentic)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진정성과 진실성에 대한 개념은 계몽주의 이후 서구 사상을 지배해 왔다. 이 시기에 칸트는 인간 조건, 나아가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개인이 자유롭게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계몽주의의 모토는: Sapere aude! (앎에 과감해져라!)”라고 칸트는 썼다.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아니타 세파(Anita Seppä)에 따르면, “우리 주변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이라는 칸트의 신념은 개인에게 “더 성숙한 존재의 단계와 개인적 자율성에 도달할” 능력을 주었다.

장 자크 루소는 존재의 신비로운 본성에 더 민감했는데, 진정한 자아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전적으로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참된 자아란 자연적이고 고정된 것이며, 이것이 세상 밖으로 얼마든지 표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포스트 계몽주의적 진정성 강박’만큼 자기몰입에 빠진 우리 시대의 문화를 뼈때리게 보여주는 철학도 드물다.

미국이라는 프로젝트의 지침이 되는 약속은 개인을 부당한 구속과 통제로부터 해방시켜, 종교, 인종, 성별, 계급적 배경과 상관없이 자신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비록 수 세기 동안 불평등하게 이행되어 왔지만, 이 약속은 여전히 미국 신화라는 덜덜거리는 엔진을 움직이는 연료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주의에 대한 절대적인 시각은 세계와 우리의 관계, 그리고 우리 자신을 형성하는 구조적 조건을 놓치게 만든다. 삶의 목적이 우리 본성의 진정한 일면을 발굴하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애초에 이러한 전제를 의심하게 만드는 무수한 사회적 연결고리와 힘들을 무시해야 할지도 모른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자기표현이 해방으로 이어진다는 이 굳건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대신 “우리가 지식을 쌓아 왔고 또 쌓으려 시도해 온 개인성, 주체성, 의식, 에고(ego)의 모든 형태”를 오히려 끝낼 것을 말했다.

푸코는 그러한 이상주의가, 개인의 실존적 자유—의료, 재생산권, 교육, 성 정체성, 경제적 평등 등—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권력 구조와 투쟁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봤다. 그런 개인의 실존적 자유는 여전히 (푸코가 인구를 조직하고 통제하는 국가 및 사회 제도를 가리켜 쓴 용어인) “생체권력”의 손아귀에 남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과시형 독서라는 현상은 사람들을 허세꾼이라 부르는 신종 수법이라기보다는, 문자에 대한 우선순위가 점점 낮아지는 사회의 불쾌한 반영처럼 보인다.

책을 읽는 것은 스크롤 하는 것과 완전 반대다. 묵직한 소설을 읽는 느리고 인내심을 요하는 복합적인 경험을 온라인은 결코 복제할 수 없다.

이는 특히 시사하는 바가 큰데, 소셜 미디어가 다른 많은 예술 소비 경험은 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틱톡이나 인스타그램을 통해 음악을 듣거나, 시각 예술을 보거나, 영화 클립을 시청하고서는, (우울하긴 하지만) 합리적으로 이 매체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앱의 도움으로 길러진 진정성 있는 관계라고—주장할 수 있다.

인터넷에 절여진 사람들이 공공장소에서 특정 종류의 책을 읽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피드에 어떻게 보일까 하는 필터를 통하는 것뿐이다. 즉, 기괴한 관종 짓, 거짓되고 자화자찬적인 조작, 혹은 연애 상대를 끌어들이려는 필사적인 시도로서 말이다.

보여주기식 독서에 대한 담론이 문해율이 하락하는 시점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기 어렵다. 미국인들이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는 비율은 20년 전보다 40% 감소했고, 4학년 학생의 40%는 기본적인 독해력이 부족하다. 엘리트 대학의 인문학 교수들은 학생들이 전체 텍스트를 읽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짧은 발췌문조차 분석하지 못한다고 개탄한다.

인공지능의 부상은 문제를 악화시키는데, 챗GPT 같은 프로그램은 정보를 직접 조사하고 종합하는 법,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 그 정보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울 필요성 자체를 없애버리겠다고 위협한다. 대학들은 오픈AI 같은 기업들과 거래를 트고 학생들의 커리큘럼에 챗봇을 도입하는 한편, 인문학과는 칼질하고 있다.

비판적 사고, 철학적 탐구, 미디어 리터러시, 도덕적 발달, 창의적이고 복합적인 문제 해결과 같은 인문학의 근본 가치들은 기업화된 대학이라는 새로운 시대에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분명 고통받을 것이다. 고등교육마저 독서를 포기했다면, 개인이 독서를 포기하는 것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

<무한한 재미>가 과시형 독서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야말로 지금의 문화적 딜레마를 다루기에 완벽하게 딱 맞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월러스는 (주: 마치 <멋진 신세계>처럼) 환경 붕괴 직전의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기업 디스토피아를 묘사하는데, 등장인물들은 이러한 실존적 현실을 좀처럼 인식하지 못한다. 외부 세계의 공포로부터—그리고 외부 세계가 내면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식별 불가능한 방식들로부터—도망치기 위해 인물들은 약물과 알코올, 빡센 스포츠 훈련, 그리고 과도한 미디어 소비에 의존한다.

특히 미디어 소비는 보는 사람을 누구든 멍청한 식물처럼 만들어버릴 만큼 강력한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카트리지로 극화된다. <무한한 재미>는 현대 생활의 ‘공유된 고독’, 즉 소비주의와 시장 자본주의 풍토병인 외로움과 의미의 부재에 집착하는 소설이다.

월러스는 자신의 작품 세계 전반에 걸쳐 주장한다. 구원은 더 넓은 범위의 관심을 통해, 그리고 코앞만 보는 좁은 자아를 더 크고, 더 신성하며, 더 숭고한 무언가에 희생함으로써 도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월러스 개인적인 삶에서 이러한 희생은 부분적으로는 독서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끊임없이 피할 수 없는 자극의 시대에 독서가 그 도덕적 지위를 잃어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2003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독서는 조용한 방에 혼자 앉아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제 친구들, 지적인 친구들조차 독서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건 단순히 지루해서가 아닙니다. 거기엔 거의 단절에 대해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 치밀어 오르기 때문이죠.”

우리의 스크린이 기가 막히게 해내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두려움을 달래주고 외로움이 사라질 때까지 스크롤 하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어쩌면 보여주기식 독서가는 바로 그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원히 죽지 않는 관중을 위해 책을 휘두르며 ‘연기(performing)’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면 어쩌면, 그들은 무대 막이 내린 뒤에도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기를 희망하며, 월러스가 말했던 바로 그 두려움 속으로 기꺼이 몸을 기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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