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의 죽음 (번역)

*철학자이자 스탠포드의 교수 레이프 웨나Leif Wenar가 와이어드에 기고한 글입니다.

샘 뱅크먼-프리드(Sam Bankman-Fried)는 마침내 벌을 받게 됐다.
그의 파괴적인 철학도 함께 법정에 세워보자.

나는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을 만나게 되면, “당신들은 지금까지 몇 명이나 죽였나요?”라고 물어보시길.

효율적 이타주의(혹은 효과적 이타주의, Effective Altruism:EA)는 지금 사기 및 자금 세탁으로 징역 25년형을 선고받은 암호화폐 천재, 샘 뱅크먼-프리드의 철학이다. 일론 머스크는 평소 효율적 이타주의가 자신의 신념과 가깝다고 말했고, 페이스북 재벌 더스틴 모스코비츠와 스카이프 공동창업자 얀 탤린도 효율적 이타주의 운동에 거액을 투자해 왔다.

이들은 미국 정치에 큰 영향을 주려고도 적극 움직였다. 2021년, 효율적 이타주의가 보유한 자금은 460억 달러(약 46조 원)에 이른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는데, 이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몇십 년간 이슬람 근본주의를 전 세계로 퍼트리는 데 쓴 비용에 맞먹는 규모였다.

효율적 이타주의는 어떠한 자원이라도 ‘세상에 최대한의 선을’ 가져오기 위해 초합리적으로(혹은 ‘슈퍼 합리적으로’) 활용하는 방법론이라고 자처한다. 여기 실리콘밸리에서는 효율적 이타주의가 엘리트층의 어떤 종교처럼 되어버렸다.

실제로 800억 달러(약 80조 원) 가치로 평가되는 테크 기업이자 챗지피티를 만든 오픈AI 이사회 구성원들도 효율적 이타주의를 믿는 인사들로 가득 찼는데(지난 11월 그들이 회사를 거의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간 바로 그날까지), 효율적 이타주의 측은 스탠퍼드 같은 부유한 대학들에서 젊은 인재를 강력히 끌어모으고 있다.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이 바로 스탠퍼드인데, 예일, 컬럼비아, UC 버클리, 펜실베이니아, 스워스모어 등 유수의 대학에서도 효율적 이타주의가 돈을 쏟으며 학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만약 당신이 부유층 학생들이 많은 학교를 나왔다면, 졸업한 모교 어딘가에 효율적 이타주의가 또아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샘 뱅크만 프리드가 몰락하기 전까지만 해도, 효율적 이타주의 철학을 창시했다는 철학자들은 그의 성공과 함께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샘 뱅크만 프리드의 암호화폐 제국이 무너지고, 효율적 이타주의 소속 직원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려 증인이 되었다. 그러자 효율적 이타주의 창시 철학자들은 서둘러 샘 뱅크만 프리드를 ‘신앙에서 벗어난 죄인’으로 몰아가려 했다.

그러나 샘 뱅크먼-프리드는 효율적 이타주의의 전형적이며 완벽한 예언자다. 효율적 이타주의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망가졌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인 셈이다. 이 효율적 이타주의 사태는 거대한 돈과 명예에 눈이 멀어 일어난 현대판 타락 우화이기도 하지만, 슈퍼컴퓨터 계산능력까지 동원된 더 기묘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몇몇 무명 철학자들이 큰 판돈을 건 억만장자들과 연결되었고, 그 억만장자들은 다시 철학자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이 둘이 자신들만의 호화로운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면서 전 세계의 수많은 천재들을 빨아들인 것이다.

사실 효율적 이타주의 초기의 사상가들과 샘 뱅크만 프리드의 결정적 차이점은, 지금 샘 뱅크만 프리드는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효율적 이타주의 창시자들은 지금까지도 그 책임으로부터 계속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중이다.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을 만나보신 적이 있나요?

아마 여러분도 그들을 좋게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세상을 개선하겠다는 이야기를 진심으로 많이 하는 젊은이들이니까. 솔직히 말해, 한때 그런 젊은이었을 이들이 많지 않을까? 사실 나 역시 그랬다. 효율적 이타주의가 만들어지기 10년 전, 나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을 구해보겠다는 꿈을 꾸었다.

나는 요즘 전형적인 효율적 이타주의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자라났다. 백인 남성, 어린 시절을 ‘스타 트렉’ 벌칸 족과 톨킨의 소설, 포트란과 아이언맨에 빠져 보냈다. 철학으로 진로를 잡은 건, 아이디어를 갖고 놀이처럼 게임을 하는 느낌이 좋아서였다. 1998년, 갓 받은 하버드 철학 박사 학위를 들고, 나는 피터 싱어(Peter Singer)―살아 있는 철학자 중 가장 영향력 있다고 여겨지는 인물―의 사상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싱어에게서 내가 가장 열광했던 아이디어는, 우리 각자가 해외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돈을 많이 기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유명한 “얕은 연못(Shallow Pond)” 사고실험이 그 논리를 보여준다.

얕은 연못에서 아이가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면, 새로 산 신발이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아이를 구해야 한다고 느끼는 게 당연하다고 싱어는 말한다. 그렇다면 해외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도, 신발 살 돈으로 기부하면 살릴 수 있다는 게 싱어의 주장이었다.

그뿐 아니라 새 옷 사는 돈 대신 기부해 또 한 명을, 외식할 돈 대신 기부해 또 한 명을 살릴 수 있으니, 결국 우리가 가진 돈 대부분을 해외로 보내야 한다는 논리적 결론이 나온다. 최대한 많은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중요한 게 과연 뭐냐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논증이었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다”거나 “빈곤은 나쁘고, 더 나은 환경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도와야 한다” 같은 보편적인 주장을 훌쩍 뛰어넘는다. 싱어가 말하는 이 “얕은 연못”의 집요한 논리는 매우 헌신적인 희생까지도 요구한다. 어떤 이들은 이 논리에 감명받아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거나 심지어 신체 장기까지 기증한다.

물론 1998년 당시 나는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희생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하는 자선단체가 어딘지 알아낼 수는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지금 보면 웃음거리 같지만) 각 자선단체의 효과를 비교해 보여주는 웹사이트를 직접 만들려고 했다. 즉, “어떻게 기부하면 가장 효과적(효율적 이타주의)인가?”를 제시해주는 웹사이트를 구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 갔다.

세계자연기금(WWF)에서 일하던 친구가 밀레니엄을 기념해 파티를 연다고 초대해 줘서, 나는 교수 첫해 받는 박봉을 모아 발리로 날아갔다. 그런데 이 친구의 방갈로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각지에서 구호활동을 하는 청년들이 들락거리는 숙소 같은 곳이었다. 이들은 연말연시 잠깐 발리 해변에 와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옥스팜(Oxfam), 세이브더칠드런, 유엔 산하 기관 같은 곳에서 일하던 이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한 네덜란드 청년은 외딴 섬에서 돼지 우리 위 다락에서 잠을 자며 말라리아에 여러 번 걸렸다고 했다. 두 영국 청년은, 매번 물품을 훔쳐가려는 현지 깡패들을 붙잡고 싸워야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며칠 동안 와서 맥주도 마시고 휴식을 취했다. 우리가 다 함께 저녁을 해 먹기로 했을 때, 내가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만약 백만 달러가 있다고 치면, 어느 자선단체에 기부하시겠어요?” 그들이 밥을 먹다 말고 나를 쳐다봤다.

“아니, 진짜 궁금해서 그래요. ‘사람 목숨을 가장 많이 살리는’ 자선단체가 어딘지….”

그러자 한 호주 청년이 “없어요, 그런 건”이라고 해서 다들 웃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구호 활동 현장에서 매일 겪는 좌절담이 쏟아졌다. 부패한 지역 공무원, 부실한 자선단체 본부, 마을 사람들을 적당히 설득해 변화를 시도하려고 애쓰다 보면 정작 그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기도 하는 고충…. 디저트를 먹을 즈음에는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고 인생을 바치는 이들조차 “우리 프로젝트가 이득보다 해악이 더 크진 않을까?”라고 침대에 누워 끙끙 앓게 된다는 얘기까지 털어놓았다.

그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창피한 얘기지만, 발리 해안가를 떠나 좀 더 내륙의 가난한 지역을 차를 타고 돌다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거기서 만난 발리 사람들은 적어도 내가 아는 미국 사람들 못지않게 성실하고 똑똑해 보였다. 당연히 생활은 훨씬 더 힘들어 보였는데, 그들의 시선에서 세상을 잠깐이나마 엿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그동안 머릿속에서 ‘아이디어 놀이’를 하던 것들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다.

“저런, 부자나라 관광객이 발리에서 한가롭게 놀면서 극빈층의 실상을 깨닫다니, 참 한심하고 오만하네”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금 이해해주길 바란다. 나는 진심으로 내 웹사이트로 인류의 목숨을 구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목숨을 구한다”는 건 소방관이나 스파이더맨이 하는 일 아닌가. 그때의 그 어린 철학자는 멋있게 영웅이 되고 싶다는, 그 막연한 허영에 취해 있었다. 그래서 섬을 떠나면서 너무 부끄러웠다.

그래도 여전히 뭔가 돕고 싶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결국 웹사이트 계획을 접고, 빈곤과 구호에 대해 10년 정도 공부했다.

나는 “구호에 돈을 보태는 것”이 본질적으로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의사들조차 약을 처방할 때 부작용을 감수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저 가난한 이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들어주고 있을 뿐”이라고 단언하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60년대 이래 구호 단체들은 몇 년 간격으로 “이번엔 정말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았다!”고 선언해왔다. 그런데 조금 지나면 매번 실망이 찾아왔다. (2000년대 초에는 ‘마이크로파이낸스’가 그 해결책으로 꼽혔었다.)

구호 사업을 연구하는 학계도 노벨상 수상자들끼리 서로 대립할 정도로 의견 충돌이 심했다. 어떤 이들은 <빈곤의 종말(The End of Poverty)> 같은 낙관적인 책을 내며 “우리가 당대에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 같은 책을 내며 “서구가 도울수록 참사만 커졌다”고 했다.

어쨌든 2달러 이하로 하루를 견디는 이들이 그 시절에도 수억 명이었고, 말라리아나 영양실조로 하루 5만 명이 사망했다. 그 모든 생명은 나와 똑같이 소중하다. 그런데 왜 ‘무엇을 어떻게 해야 가난을 줄일 수 있는가’를 알아내기가 이렇게 어려운 걸까?

나는 구호 사업을 배우는 동안, 그나마 “뭐가 효과 있는지”를 좀 더 객관적으로 알아보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았다. 예컨대 마을 절반에는 모기장을 나눠주고, 나머지 절반은 ‘통제 집단’으로 두어 비교하는 ‘의약품 임상시험’식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이 결과들을 어느 정도까지 신뢰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논쟁이 많지만, 그래도 한 걸음 나아간 실천이라고들 봤다.

그럼에도 “통제 집단” 실험조차 보여주는 건 극히 국지적인 효과일 뿐임을 깨달았다. 극빈층이 사는 환경은 우리가 사는 곳만큼이나 복잡하며, 보통은 훨씬 더 혼란스럽다. 거기에 추가 자원을 쏟아붓는다는 건, 실험에서 잡히지 않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무엇이 정말로 효과적인가?”를 찾기 어려운 진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가령 내가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가난한 사람들 건강 증진을 약속하는 자선단체에 돈을 기부했다고 치자. 그리고 국지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 단체의 활동이 실제로 효과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돈이 ‘다른 어떤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지 않나?

이를테면 구호단체가 지역 유지의 권세를 더 키워줄 수도 있고, 구호단체가 기부한 의약품 덕에 부패한 정권이 예산을 다른 데로 돌릴 수도 있다. 또는 원래 그 나라 정부가 자국민을 위한 보건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책임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어차피 부자나라가 다 도와주겠지”라는 인식이 생기면, 정부가 복지에 관심을 줄일 테니까.

구호 전문가들은 이런 부정적 파급효과를 이미 잘 안다. 이는 약물의 부작용과 비슷하다. 뇌졸중 위험을 줄이려고 혈액 희석제를 쓰면, 상처가 잘 아물지 않을 수도 있는 식이다. 진통제를 많이 먹으면 신장 손상이 생길 수도 있듯이 말이다.

‘만약 언젠가 우리나라가 구호의 대상이 된다면?’이라고 상상해보면, 그 부작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피부로 느낄 수도 있다.

가령 20년 뒤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고, 미국이 연이은 위기와 붕괴로 빈곤국이 되었다고 치자. 그때 어떤 중국인 억만장자들이 불쌍한 미국 아이들을 도우려고 마음먹는다. 이들은 “아이들의 기대수명을 한 달 늘려주는 신약”을 개발해서, 우리 지역 교육청장에게 그 약을 무상 지원한다. 그리고 교육청장은 모든 초등학교 선생님들에게 “아침 조회 전에 아이들에게 약을 먹여라”라고 지시한다.

그런데 어느 날 당신 애들이 학교에서 전화를 해달라며 연락을 했다. 한 아이는 구토를 하고, 다른 아이는 어지러워 걸을 수 없다고 한다. 알고 보니 선생님들이 부모인 당신에게 아무 말 없이 그 약을 먹인 것이다.

다행히 그 다음날엔 아이들이 좋아졌다고 해도, 당신 기분은 어떨까? 선생님과 교육청장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 들고, “우리는 가난한 서양인들을 돕고 왔다”라며 자국에서 자랑 중인 중국 ‘억만장자’들은 또 어떻게 보이겠는가?

나 같은 철학자조차 이걸 깨닫는 데 오래 걸렸다. 모기장처럼 ‘눈앞에 보이는 효과’는 광고하기 좋지만, 정치적·경제적·심리적 측면의 파급효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건, 사실 이 모든 개입을 받는 현지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혹시 피해를 봐도 책임을 묻기 어렵다.

결국 나는 이런 내용을 담아 “가난은 얕은 연못이 아니다(Poverty Is No Pond)”라는 논문을 썼다. 그리고 “책임 있는 선택을 한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부정적 영향’의 위험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요지로 정리했다.

이 말이 “구호가 무의미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현장에서 구슬땀 흘리며 애쓰는 분들은 정말 많고, 여러 이득과 비용을 저울질하며 힘든 결정을 내리고 있다. 기부 역시 의사의 처방과 마찬가지로 부작용을 알면서도 실행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무조건 좋은 일만 하고 있다”고 호언장담해서는 안 된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지를 수치화한다?

그러던 중, 내가 구호 관련 논문을 마무리할 무렵 옥스퍼드에서 온 젊은 호주 철학자가 우리 대학에서 “나는 그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고 강연했다. 그는 바로 토비 오드(Toby Ord)로, 당시 막 효율적 이타주의(EA)를 시작하던 참이었다.

이미 십여 년 전에 나 자신이 피터 싱어의 “얕은 연못” 논리를 붙들고 있었던 것처럼, 오드 역시 같은 논리에 열광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새로 보탰다는 점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지를 수치화한다’는 거였다.

기본 형태는 이렇다. 가령 1년의 수명을 늘려주는 약이 있다고 해보자. 오드가 자선단체에 50달러를 기부하면, 그 단체는 빈곤한 해외 사람들에게 약 50알을 나눠줄 것이고, 그렇게 해서 ‘총 50년’의 생명을 늘렸다 볼 수 있다. 50년을 늘렸다는 건, 얕은 연못의 아이 한 명을 살린 것과 같으니, 50달러를 기부하면 가난한 아이 하나를 “살린 셈”이 된다는 식이다.

그날 오드와 함께 무대에 오른 사람은, 기독교 구호단체(Christian Aid)의 전 이사이자 <과연 해외 원조는 효과가 있는가? (Does Foreign Aid Really Work?)>라는 방대한 책을 낸 전문가 로저 리델이었다. 그는 오드에게 “실제로 구호가 단순히 ‘약을 나눠주면 된다’ 수준이 아니다”라고 설득하려 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나도 같은 취지로 오드를 다그쳤다. 솔직히 말해, 젊었을 때 내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도 있고 해서, 좀 심하게 몰아붙인 것 같다. 그 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자, 오드는 내가 ‘효율적 이타주의 광기’라 부르는, 특유의 반짝이는 눈빛을 띄기 시작했다.

업튼 싱클레어가 “사람이 뭔가를 이해하지 못하는/않는 이유는, 그 이해를 하지 않는 데서 오는 이익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는데, 그가 그랬다. 여기에 자존심까지 결합하면 더 심해진다.

오드는 자신을 “똑똑해서 영웅이 되는 사람”으로 여기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광기어린 눈동자 너머에서 생각하는 건 아마 “이 사람들은 날 막으려 드는군…”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물 몇 살짜리 헤지펀드 분석가 두 명이 회사를 관두고, “효과적인 기부를 위한” 웹사이트를 열었다. 내가 예전에 만들려다 포기한 웹사이트 아이디어와 비슷했다. 그들은 사이트 이름을 기브웰(GiveWell)이라 지었다.

예전의 나처럼, 이 둘도 구호 분야와는 무관했고, 그저 마다가스카르에서 모기장을 나눠주는 단체를 우연히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이들은 모기장 보급에 드는 비용과, 모기장이 말라리아 예방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계산했다.

그리고 오드가 쓴 방식과 비슷하게 “달러당 구호” 수치를 도출했다. 예컨대 열일곱 줄짜리 엑셀 표에 소숫점까지 딱딱 맞춰서 기입한 뒤, “이 단체라면 820달러로 한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웹사이트에 올렸다.

나는 그 무렵 “가난은 얕은 연못이 아니다(Poverty Is No Pond)”의 초안을 쓰면서, 기브웰이 추천하는 모기장 자선단체에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예를 들어, 그 단체가 마다가스카르 부패 정권에 세금을 내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원래 정부가 모기장을 지원하던 체계가 무력화되어, 주민들이 정부와 맺어온 사회적 계약이 약해질 위험은 없을까?

그 초안을 기브웰에 보내니, 당시 공동디렉터였던 홀든 카노프스키(Holden Karnofsky)가 답을 보내왔다. “잘 운영되는 자선단체라면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클 것”이라는 것이었다. 즉 “수혜자들”이 보는 이익에서, “또 다른 가난한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손해를 빼도 여전히 이득이 클 거라는 식이었다.

나는 “그렇다면 기부를 받을 때마다, 가능한 부정적 외부효과도 함께 웹사이트에 서술해줄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카노프스키는 “중요한 지적이니 그 부분을 강조하겠다”고 했다.

그게 벌써 십 년도 넘은 얘기다. 오늘날 기브웰은 ‘수혜자들이 얻는 이득’에 관한 계산 결과를 사이트에 훨씬 더 자세히 게재하고 있다. 예컨대 2020년의 한 추정치에 따르면, 기니에서 모기장을 배포하는 자선단체에 4,500달러를 기부하면, 총 1,001개의 모기장을 보급할 수 있고, 그중 79%가 실제 사용되며, 모기장 하나당 보통 1.8명을 커버하니 등등의 확률들을 종합하면, 결과적으로 그 4,500달러로 한 사람을 살려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언뜻 보기에는 훌륭해 보인다. 하지만 기브웰은 여전히 그 자선단체가 “수혜자들 외에 끼치는 영향”—다시 말해, 잘 알려진 ‘구호의 부정적 외부효과’—에 대해선 방문자들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사실 기브웰이 10년 넘게 추천하고 있는 그 모기장 자선단체에 쓰이는 모기장들은, 말라리아 예방뿐 아니라 ‘어업용 그물’로 쓰기에도 좋다. 2016년 <뉴욕타임스>는 아프리카 곳곳에서 사람들이 이 모기장으로 물고기를 지나치게 잡아 식량 자원이 위태로워진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기브웰은 블로그 글을 올려, “그건 지나가는 에피소드고 관련 근거가 충분치 않다. 우리가 추천하는 단체가 지원하는 모기장에는 크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작 기브웰 자체 추산에 따르면, 실제 회수 점검 시 모기장이 “침대 위”에 걸려 있지 않은 경우가 거의 3분의 1 가까이 된다고 하면서도, 이후 이런 문제가 점점 더 많은 과학적 연구로 지적되는 상황에서도 그 부작용을 모기장 자선단체 효과 계산에서 배제하고 있다.

더 나아가, 기브웰이 그나마 부정적 사례를 언급할 때조차 별다른 비중 없이 살짝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기브웰이 현재 ‘최고 추천 단체’ 중 하나로 꼽는 곳은, 나이지리아 북부처럼 위험한 지역으로 자금을 보내, 아이들을 예방접종하는 엄마들에게 금전 보조를 해주는 단체다.

기브웰 사이트 분석 페이지 하단을 보면, 그 보조금이 있는 곳을 노린 무장단체 공격 사례가 보고된다—심지어 어떤 강도는 돈을 찾다가 두 명을 살해하고 아이 둘을 납치했다고 한다.

보통 이런 일이 벌어지면, 해당 자선단체가 “도대체 이런 위험 사례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독립적으로 조사해야 한다”는 논의가 먼저 나오지 않겠는가? 그런데 기브웰은 이미 파악된 사망 사례도 정식 수치에 반영하지 않은 채,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이득이 크다”는 식으로 끝냈다.

더 범위를 넓혀보면, 기브웰은 구호 관련해 널리 알려진 다른 부작용도 여전히 계산에서 무시한다. 예컨대 자선단체가 현지 정부 의료진을 빼버리면, 유아 사망률이 증가할 수 있다는 연구가 있고, 구호 자금이 유입되면 그 지역 반군이 더욱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연구도 있다.

기브웰이 “이런 건 계산하기 어렵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작 ‘수혜자에게 생기는 긍정 효과’를 계산할 때는, 다들 불확실해 하는 수치조차 온갖 가정을 붙여서 꼼꼼히 숫자로 만들지 않는가?

결국 기브웰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컴퓨터식 계산’이라는 명성을 지키고 싶으면서도, 현실에선 그것을 어찌 적용해야 할지 피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만큼의 확률로 이득이 있다면, 저만큼의 확률로 손해도 있을 것”이 논리상 당연한데, 앞의 수치는 더하는 반면 뒤의 수치는 빼거나 애써 모르는 척하는 식이다.

기브웰 공동설립자 중 한 명이자 현재 CEO인 엘리에 하센펠드(Elie Hassenfeld)는 와이어드(WIRED) 매체에 “우리는 매년 수만 시간을 연구에 투입해, 더 많은 선행을 원하는 기부자들이 어디에 기부하면 좋을지 정보 제공을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기부자들이 실제로 그 ‘온전한 정보’를 얻고 있는지 의문이다.

부작용 데이터를 보고하지 않는 제약회사를 떠올려보자. “아무튼 결과적으로 좋은 약이니 괜찮다”며 넘어간다면, 그 피해는 결국 소비자나 환자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기브웰도 마찬가지다. 일단 그들이 광고하는 ‘이득’은 일부 빈곤층에게 돌아가지만, 그들이 말하지 않는 ‘피해’는 또 다른 빈곤층이 떠안을 수 있다.

지금 기브웰 홈페이지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구한 사람 수”만 큼직하게 써 있다. 좀 더 진정성을 갖춘다면, “우리가 죽게 했을지도 모르는 사람 수”도 함께 대문짝만 하게 올려야 할 것이다.

나는 “가난은 얕은 연못이 아니다”를 마무리하며, 효율적 이타주의에게 꼭 하고 싶은 메시지 하나를 추가했다. 요약하자면, “극빈층 문제는 나나 너의 무용담을 위한 소재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 삶에 개입하기로 했으면, 가능한 한 그들에게 결정권을 주고,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벌어서 기부하기 Earning to give

그 뒤 ‘효율적 이타주의가 언젠가는 실패할 것이다’라고 생각한 나는 다른 일을 하러 갔다. 그런데 내가 예상 못 했던 게 있었다. 바로 ‘영업의 귀재’와 ‘억만장자’들이었다.

그 영업의 귀재는 윌 맥어스킬(Will MacAskill)이라는, 또 다른 옥스퍼드 출신의 젊은 철학 박사였다. 2012년, 맥어스킬은 미국의 명문대학 캠퍼스를 돌며 미래의 효율적 이타주의 기부자를 찾아다녔다. MIT에서 당시 학부 물리학도였던 샘 뱅크먼-프리드를 만나게 되었다.

샘 뱅크만 프리드는 동물 보호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맥어스킬은 그에게 “정말 세상에 큰 선을 베풀려면, 오히려 투자금융 쪽으로 가서 엄청난 돈을 번 뒤, 그 돈을 거액으로 기부하는 게 낫다”고 했다. 이른바 “Earning to give”(벌어서 기부하기) 전략 말이다. 샘 뱅크만 프리드에게는 완벽한 미끼였다.

토비 오드가 진지한 분위기였다면, 맥어스킬은 거침 없고 화려한 사람이었다. 그의 효율적 이타주의에 관한 책 챕터 중 하나가 “당신이 어떻게 하면 수백 명을 살릴 수 있는가?”다. 거기서 맥어스킬은 효율적 이타주의 방식으로 기부하면 히어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불타는 건물에서 사람을 구출하는 영웅, 혹은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처럼 숭고한 행동을 하는 이가 바로 기부자 당신이라는 식이다. “당신의 기부가 엄청난 선행을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책에서 “구호에 회의적인 전문가들이 많다”는 걸 인정은 한다. 하지만 이내 “해외 원조는 ‘엄청난 효과’를 보여줬다”고 열정적으로 쓴다:

「‘원조해봤자 성과가 미미하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최저 빈곤층(hardcore poverty)’—지난 몇십 년간 경제성장이 가장 미약했던 국가들—에서도, 삶의 질은 극적으로 올라갔다.

예를 들어 1950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평균수명은 겨우 36.7세였는데, 이제는 56세다. 무려 50%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 사실 원조로 쓰인 돈은 극히 일부일 뿐인데, 그럼에도 세계 최빈곤층의 복지는 이렇게나 크게 개선됐다.」

그런데 이건 정말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해외 원조 분야에서 ‘원조’가 ‘사하라 이남 평균수명을 50%나 늘렸다’는 비약을 주장할 사람은 원조 낙관론자들 중에서도 거의 없을 거다.

게다가 맥어스킬은 이 황당한 서술 뒤에 줄줄이 각주와 단서를 달아놓지만, 이미 저 문장 자체가 너무 무책임하다. 조금만 구호활동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맥어스킬이 이마에 “나는 진지하지 않음(Not Serious)”이라고 문신을 새긴 셈이라고 느낄 정도다.

그런 다음, 맥어스킬은 가난한 나라에 특정 물자를 지원하는 게 특히 효과적이라고 홍보한다. 과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칭송받다가 결국 실망을 준 ‘마이크로 크레디트’는 형편없다고 깎아내리고, 그 무렵 새롭게 각광받던 “구충약(deworming) 공급 사업”을 고평가했다.

그러나 그 책이 출간된 뒤, 정작 맥어스킬이 극찬했던 연구기관은 “집단 구충 사업이 별 효과가 없다”는 보고서를 냈다. 기브웰도 거의 10년 동안 ‘최고 추천단체’라고 칭해왔던 구충 관련 단체를 평가절하한 뒤 현재는 기부를 받고 있지 않다.

맥어스킬은 또 “내가 말하는 ‘이타주의’란, ‘다른 이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으로 간단히 정의된다”고도 주장한다. 그런데 이건 웬만한 철학 전공자는 읽자마자 머리카락이 곤두설 만한 문장이다.

실제 이타주의(altruism)란, 타인의 안녕을 이기심 없이 배려한다는 의미다. 즉, 도우려 하는지, 어떻게 도우려 하는지까지 개념에 포함된다. 그런데 맥어스킬식 정의대로라면, 누군가 전혀 의도치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남의 삶이 좀 나아지기만 해도, 그건 ‘이타주의’가 된다.

심지어 <스위니 토드>의 주인공이 런던 사람들을 죽여 파이로 만들어 팔아도, 그 파이를 맛있게 먹는 수많은 런던 시민들의 삶이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나아졌다면 그도 “이타주의자”라는 우스꽝스러운 결론이 가능해진다.

거기에 더해, 맥어스킬은 “당신이 효율적 이타주의 자선단체에 돈을 기부해, 예컨대 말라리아 모기장으로 한 아이를 구했다면, 그것은 불타는 건물에서 아이를 구한 것과 똑같이 ‘아이 한 명의 목숨을 살린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하지 않았다면 그 아이가 죽었을 것”이므로, 그 아이가 살아난 데 따른 ‘공로’를 전부 당신이 가져가도 된다는 논리다.

하지만 여기서 ‘당신이 구했다’고 말하는 바로 그 말라위(Malawi)의 남자아이에 대해 정말 당신이 전부 다 공을 차지해도 되는 걸까? 애초에 모기장을 발명·개발한 사람들은? 게다가 그 아이의 엄마가 “이 모기장을 어떻게 쓰고, 언제 깔 것인지”를 결정한 주체인데, 그녀가 없었다면 아무리 모기장이 있어도 아이는 못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이 엄마의 선택과 의지 역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사실 따져보면, “당신의 기부로 말라위의 그 어머니가 아기를 살릴 기회를 얻었다”고 표현하는 편이 훨씬 온당해 보이지 않나?

성공에는 부모(를 주장하는 이)가 많다는 옛말이 있듯이, 이런 문제는 간단치 않다. 최소한 “그 기여를 전부 더해도 된다”고 치면, ‘나쁜 결과’가 생겼을 때도 전부 나누어서 책임져야 논리적으로 맞지 않을까?

예컨대 맥어스킬이 “샘 뱅크만 프리드에게 금융업에 들어가라고 권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그로 인해 샘 뱅크만 프리드가 벌인 모든 일을 맥어스킬도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맥어스킬이 “샘 뱅크만 프리드랑 같이 자신을 감방에 보내 달라”고 자진해야 맞지 않겠는가?


기대값(expected value) 계산

물론 이런 황당무계한 얘기가 그 자체로 끝날 일이었다면 별 문제가 안 됐겠지만, 테크 업계의 억만장자들이 합류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은 억만장자들에게 아주 그럴듯해 보이는 언어로 말했던 것이다.

효율적 이타주의 철학의 핵심은, 벤처캐피털(VC) 업계에서 일상적으로 활용하는 한 가지 사고 도구에서 비롯된다. 경제학 입문서에서 배우는 “기대값(expected value) 계산”이다.

예를 들어, 100달러를 어떻게 투자할지 고민한다고 치자. 어떤 주식이 60% 확률로 10달러 이익을 낳고, 40% 확률로 10달러 손실을 낳을 거라고 가정하면, 그 수학적 기대값을 따져보면 102달러가 된다(=100+10*0.6-10*0.4). 그리고 나서 다른 주식들의 기대값도 비슷하게 계산해본 뒤, 그중 가장 높은 주식을 사면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런 기대값 사고법은 이기적 목표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자기 이득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이익’을 최대화하려 해도, 계산 방식은 같다. 효율적 이타주의가 장려하는 건 바로 이 기대값 계산을 ‘도덕적 의사결정’에도 적용하는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기브웰이 저개발 지역의 인명 구호를 위해 이미 다 계산해놓은게 있으니, 단지 몇 번의 클릭이면 수백 명의 목숨을 살리고도 남는다.”

나아가 효율적 이타주의는 이 ‘먼저 벌고 기부하기(Earning to give)’를 인생설계 차원으로도 권했다. 수학에 뛰어난 학생들이 금융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고, 그 돈을 효율적 이타주의 단체에 기부해 수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부추긴 것이다. “높은 연봉을 받으라, 그럼 당신의 기부가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기대값 사고가 금융에는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기 인생 전반에 이를 적용한다면 어떨까? 매 순간, 분 단위까지 기대값을 계산해보며 최적의 판단을 내린다면?

그게 바로 샘 뱅크먼-프리드다. 그가 효율적 이타주의 진영에 포섭된 건 매우 자연스러웠다. 이미 샘 뱅크만 프리드 스스로 기대값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루이스의 책에 따르면, 샘 뱅크만 프리드는 늘 모든 선택에 대해 “이걸로 기대값이 얼마나 될까?”라고 머릿속에서 계산한다. 그리고 감정적·인간적 유대 같은 건 배제한다. 효율적 이타주의에서는 이런 식의 “이성적(rational)인 사고”를 장려한다. 그 입장에선 딱 맞아떨어진 셈이다.

샘 뱅크만 프리드가 가진 사고방식을 체감해보려면, 일종의 “확률 게임”을 상상해보면 된다. 확률 51%로 지구 같은 행성을 또 하나 만들 수 있고, 반면 49% 확률로 인류 전체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게임이 있다면, 기대값 계산 관점에서 “인류가 가진 모든 가치는 플러스”니까, 이런 베팅은 수학적으로 합리적이다.

샘 뱅크만 프리드는 이 게임을 망설이지 않고 하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당첨되면 또 더블로 베팅을 반복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기대값 계산의 논리대로라면, “조금이라도 이득 가능성이 더 크면, 전 인류를 멸망시킬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 역시, 합리적이다.

또한 샘 뱅크만 프리드가 왜 투자자들과 화상회의(Zoom 미팅)를 하면서도 계속 게임을 하곤 했는지(실제로 그렇게 했다 알려짐)도 기대값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이 회의에서 얻을 이득 + 게임을 해서 얻을 즐거움”을 합치면,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편이 기대효용이 더 높다는 식이다.

중요한 건, 그가 이런 식으로 사람도 ‘게임처럼’ 다룬다는 거다. 마이클 루이스에 따르면, 샘 뱅크만 프리드는 효율적 이타주의 공동체에서 만난 여자친구와의 관계도, ‘섹스를 원할 때는 기대값이 오르지만 직후엔 또 떨어지는’ 식으로 계산했다고 한다. 이게 바로 “어떤 자원이든 최대한 가치 있게 써야 한다”는 효율적 이타주의 철학의 완벽한 구현일 테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에게는 ‘가치 창출을 위한 자원’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언론과 작가들, 재판 과정을 다룬 사람들의 샘 뱅크만 프리드에 대한 해석은 서로 다르다. “그는 사악한 악당인가, 아니면 운 나쁜 성자였나?” “그가 정말 진심으로 ‘우주 전체의 가치를 극대화’하려 했나, 아니면 사실 자기 이익만 노린 것이었을까?”

나는 아마도 그의 머릿속에서 그 두 가지가 섞였으리라 짐작한다. 어차피 “버는 대로 기부하기”라면, 돈을 최대한 많이 버는 것이 곧 세상에 이로운 일이라고 믿게 되니까. 매 순간 기대값을 극대화하려다 보면, 평범한 회사라면 필수적인 감사나 CFO(최고재무책임자)를 두는 게 ‘쓸데없이 돈과 시간을 잡아먹는 일’ 정도로 보였을 수도 있다. 결국 샘 뱅크만 프리드는 ‘나한테 이로운 길’과 ‘인류에 이로운 길’을 동일시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그가 내린 결정들은 하나같이 형편없었다. 도망칠 방법도, 언론에 여자친구의 일기를 유출해버리는 결정도 (검찰에 따르면) 그냥 최악이었다. 재판에서도 본인이 직접 증언을 자처했다가 스스로 자멸하는 모습이 나왔다. 심지어 구치소에서 재판받던 태도 자체가 좀처럼 “합리적”이라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경제학(사람들이 합리적으로 기대값을 계산한다)이 아니라 심리학 101로 넘어가야 한다. 다니엘 카너먼(Daniel Kahneman)이 말했듯, “우리 각자는 자신이 실은 생각보다 훨씬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기대값 계산 같은 걸 할 때, 우리는 얼마든지 자기합리화나 자기 이익에 치우친 편향에 빠질 수 있다. 결국 법정에서 샘 뱅크만 프리드의 자기기만은 현실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배심원들은 그를 사기·음모 혐의 모두에서 유죄라고 판단했고, 기대값으로 계속해서 무언가를 계산하던 그의 결과물은 징역 25년이 되어버렸다.

샘 뱅크만 프리드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은 부랴부랴 그와의 거리를 최대한 벌리려 애썼다. 그렇지만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은 그들의 지도부 철학이 얼마나 샘 뱅크만 프리드의 그 결함 많은 논리와 닮았는지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효율적 이타주의 사상가들에게도 ‘타인을 위한 선행’과 ‘자기 이익’은 자꾸 뒤섞였다. 샘 뱅크만 프리드가 바하마에 대저택을 사들이고 효율적 이타주의의 직원들에게 거주 편의를 제공했듯이, 효율적 이타주의 수장들도 중세 영국식 대저택과 체코의 성을 사들이며 그들만의 사치를 누렸다.

전세기를 타고, 한 끼 500달러짜리 식사를 하고, 맥어스킬은 두 번째 책 홍보를 위해 엄청난 홍보비를 들여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다. 그들이 “우리는 인류에 어마어마한 선행을 하고 있다”고 믿는 순간, 그들은 그런 혜택을 누리는 데에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철학 공부가 자기기만에 대한 면역력을 주진 않는다는 것만 또렷해졌다.


효율적이며 이타주의적인, 분식회계

샘 뱅크만 프리드의 돈이 계속 흘러넘치던 시기, 효율적 이타주의는 대학생을 대거 포섭했다. 기브웰의 카노프스키는 수억 달러를 기부하는 효율적 이타주의 재단으로 자리를 옮겨, ‘글로벌 프라이어리티(Global Priorities)’니 ‘인류의 미래(Future of Humanity)’ 같은 거창한 이름을 단 연구소들을 만들고, 매년 몇천만 달러씩 쏟아부었다.

게다가 형이상학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트랜스휴머니즘(인간을 초월한 사이보그가 되길 갈망하는 운동)이나, ‘합리주의자(Rationalists)’라는 (일부에서는 ‘멘사에 섹스가 추가된 모임’ 정도로 묘사하는) 컬트와도 합을 맞추며, 효율적 이타주의가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심지어 특정 빅테크 기업 이사회도 효율적 이타주의 인사들이 장악했다(나중엔 회사가 망가질 뻔했다).

효율적 이타주의가 한순간에 어디서나 보이는 흐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효율적 이타주의 지도부의 논리는 갈수록 점점 빈약해져만 갔다.

예컨대 기브웰만 봐도 알 수 있다. 샘 뱅크만 프리드가 있던 때, 기브웰 홈페이지는 “우리가 얼마나 깊이 있는 평가를 해서, 얼마나 ‘효과적’인 자선단체를 찾아냈고, 이들이 얼마나 ‘엄청난 선행’을 하는가!”라는 식으로 대놓고 선전했다.

한 사람을 구하는 데 3,500달러가 든다는 구체적 수치도 내세우고, “우리가 지금까지 살린 목숨이 XX명”이라는 식으로 광고했다. 그런데 막상 사이트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이 수치들은 빈약한 근거와 말도 안되는 단서 조건들 위에 만들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가령 10년 넘게 기브웰이 최고 자선단체로 꼽아온 구충 관련 단체의 사례를 보면, “정부가 원래 하던 것보다 구충 캠페인이 더 효과를 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기브웰이 주장하던 건, 그 구호 대상이었던 5개국 중 단 한 나라의 하위 관리 한 명과 딱 한 번 인터뷰를 했다는 것뿐이었다. 이걸 “철저히 검증된 최고의 단체”라고 포장해왔던 셈이다.

게다가 수치 부분에서도, 홈페이지 앞부분은 무오류의 확신으로 가득해 보이지만,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매우 대략적인 추정치”, “자료가 제한됨”, “확신이 서지 않음”, “상당히 불확실”, “주관적이고 불확실한 입력값” 같은 표현이 수시로 등장한다.

“우리는 이 비용-효과비(cost-effectiveness) 수치를 매우 조심스럽게 봐야 하며, 이 값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말까지 써 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맥어스킬이 쓴 두 번째 책도 그와 비슷했다. (첫 책에서는 “돈을 어디에 기부하면 좋은가”를 알려주고, 두 번째 책에서는 “삶의 많은 부분을 어떻게 영위해야 하는가”를 다룬다.) 그는 “이번엔 방대한 컨설턴트와 리서치 어시스턴트 팀, 그리고 2년에 가까운 팩트체크 과정을 거쳤다”며 이 책이 10년 이상 공들인 역작이라 자랑한다.

그 기백은 책 전체에 걸쳐 스며들어, 여기저기서 꽤 단정적인 어조로 “해야 할 일”을 말한다. 예컨대 환경문제 해결에 관심이 있다면, “재활용이나 채식 전환 같은 건 우선순위가 낮고, 대신 3,000달러만 있으면 Clean Air Task Force(CATF)라는 로비단체에 기부해 탄소 배출을 연간 3,000미터톤(톤이 아니라 미터톤이다)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엄청난 효과 아닌가?

그런데 실제로 그 숫자가 어디서 나온 거냐 하면, 오드의 조교였던 한 연구원이 “기후·에너지·정책” 전문성도 특별히 없어 보이는 상태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근거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탄소 포집·저장”이라는 논쟁 많은 기술을 최고의 해법으로 뽑았고, CATF가 이걸 로비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그 연구원은 CATF 측 인사와 CATF에 자금을 댄 투자자들, 그리고 신원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몇몇 인물에게 물어 “이 로비가 얼마나 성과가 있었는지” 물었다. 그 뒤 자신이 “대충 추산한” 계수를 바탕으로 “1달러 기부 시 줄어드는 이산화탄소량”을 계산해 냈다.

본인도 “여전히 확신은 없다”고 붙였는데, 맥어스킬은 그걸 책에 과감히 인용하면서 “3,000달러면 3,000톤(혹은 미터톤) 감축”이라고 공언한 것이다.

즉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근거가 부족한데도, 겉으론 매우 과학적인 수치처럼 포장하는 것이 효율적 이타주의의 관행이다. 효율적 이타주의는 갖은 수를 동원해 “우리가 모든 주제를 두루 마스터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은 차근차근 관련 분야 전문가들을 모으거나 자료를 종합한 게 아니라, 그저 내부 인원끼리 문서 작성하고, 그것을 내부 토론 게시판 등에서 “검토”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폐쇄적으로 검토하다 보면, 사회학에서 흔히 말하는 집단사고(groupthink)나 서열 효과가 작용하기 딱 좋다. 결국, 최고 지위를 가진 효율적 이타주의 단체들이 자신만만하게 말하면 그대로 통과되는 셈이다. 이런 방식으로 효율적 이타주의는 자기들끼리만 계속 논의하며 괴이하게 굳어져갔다.

결정적으로 돈이 크게 들어오자, 효율적 이타주의 철학자들은 억만장자를 초청했고, 이제는 억만장자들이 ‘파티의 DJ’를 자처하며 모든 흐름을 주도하게 됐다.


우리가 은하계를 지키고 있다

나는 테크 억만장자들이 단지 어떤 인간 한 명의 생명을 구하는 ‘작은 히어로’가 되고 싶어 한 게 아니라고 본다. 그 정도는 소방관이나 스파이더맨이 하는 일이니까.

억만장자들은 인류 전체를 구하는 히어로, 그러니까 아이언맨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던 거다. 샘 뱅크먼-프리드 역시, 사실상 모기장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가 전부를 걸었던 건 ‘우주가 끝날 때까지 우주의 가치를 최대화하겠다’는 철학이었다.

그리고 사상가들은 그와 발을 맞췄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의 가치를 현재 세대와 동등하게 본다는, 이른바 ‘장기주의(longtermism)’를 급부상시키기 시작했다. 실제로 인구가 계속 늘어난다고 가정하면, 미래에 태어날 인류가 현재 인류보다 훨씬 더 클 테니, 그들의 가치가 더 크다고도 주장한다.

이런 식이면, 마치 일론 머스크처럼 탄자니아 아이 몇 백 명에게 구충약을 주느니, 우주 항공 분야 연구에 돈을 쏟아서 수백만 명의 미탄생 인류가 지구 바깥 – 화성 같은 별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논리가 나온다.

억만장자와 철학자들 양쪽 모두에게 장기주의는 편리했다. 이제 자선단체 홍보에 나섰다가 언론이 부정적 보도를 하는 식의 골치 아픈 일이 없어질 테니까. “우리가 은하계를 지키고 있다”고 뻐기며 이야기해도, 22세기에 태어날 사람들이 반박할 리 없으니 말이다.

장기주의가 가진 원시적이고 위험한 논리에 대해, 몇몇 똑똑한 젊은 효율적 이타주의자가 공개 비판을 하기도 했지만, 효율적 이타주의 수뇌부는 “효율적 이타주의 핵심 인물을 비판하면 자금줄이 막힐 수도 있다”며 그들의 목소리를 억누르려 들었다. 효율적 이타주의가 마지막 단계로 치달을 무렵, 정말 기괴한 일들이 생겼다.

물론 장기주의가 주장하는 것 중 “좋은 점”은 사실 새로운 게 아니다. 부처나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같은 이들도 이미 오래전부터 “모든 감각적 존재가 잘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기주의자들이 새로이 보탠 건, 모든 현상에 확률을 할당하는 ‘파티 트릭’이었다. 예를 들어 토비 오드(Toby Ord)는 자기 장기주의 책에서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인류가 존재론적 위기를 겪을 확률은 17% 정도”라고 딱 잘라 말한다.

윌 맥어스킬(Will MacAskill)이 보탠 건, 한결같은 오만함이다. 그의 장기주의 책에서 그는 “글로벌 사회 구조를 어떻게 재설계하고, 어떻게 문명을 지켜야 하는지”를 설파한다. 핵전쟁을 막고, 치명적 병원체와 싸우고, 인류 미래를 이끌 가치를 선정하는 법에 대해서도 ‘이 세계가 해야 할 일’을 안다는 듯 말한다.

물론 의도가 좋고, 논리적 엄밀함을 추구하려는 효율적 이타주의자들도 분명 있다. 하지만 효율적 이타주의라고 해서 늘 그 장점을 발휘하는 건 아니다.

결국 빈약한 증거 위에 온갖 ‘정밀해 보이는 추측’을 올려놓는 기존 방식 그대로인데, 문제는 이제 그 결과물이 현재가 아니라 먼 미래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장기주의는 오히려 효율적 이타주의의 방식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전문성이나 책임감은 최소화하면서, 그럴듯해 보이는 지적 허세를 최대화하려고 애쓰는’ 모습이란 뜻이다.

뭔가가 일어날 확률을 57%라고 떠벌리고 그게 틀려도, “난 확률적 추정이었으니 틀렸다고 할 수 없다”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이런 ‘기대값에 근거한 선언’은 철학에서 말하는 X소리(bullshit)의 전형적인 예로 볼 수 있다.

구호 사업에 기대값 사고를 무작정 들이대는 것만으로도 엉성한데, “아주 먼 미래”까지 다룰 경우엔 거의 영화 속 빌런 스토리처럼 된다. 정말로 “미래에 태어날 수십억 명을 구해야 하니, 지금 수많은 사람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믿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샘 뱅크만 프리드가 말했던 “반반 확률로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베팅한다”는 사고방식이 바로 그 극단적인 예다. 장기주의자라면 동전 던지기 하듯 계속 ‘더블 또는 제로’를 택해야 하는 논리다.

맥어스킬이 때때로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건 거의 언제나 옳지 않다”고 짤막하게 언급하기도 하지만, 정작 자기들이 선보이는 수치놀음 논리는 어디로든 폭주할 수 있다. 잔치판 부수기 직전에 갑자기 “자, 지금부턴 조심하자!”라고 외친들, 이미 늦은 셈이다.

그럼에도 장기주의는 효율적 이타주의 안에서 순식간에 인기를 끌었다. 맥어스킬의 장기주의 책 챕터 중 하나의 제목이 “당신이 세계사의 궤적을 바꿀 수 있다”일 정도다. 효율적 이타주의가 ‘이성적 논리’를 지향할 때 빛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단순히 ‘중요한 것 같다’는 말만 해서 돈이나 지위, 혹은 다른 이득(심지어 성적 이득)까지 얻을 수 있다면, 적잖은 젊은이들이 ‘적당히 확률을 뻥튀기해서’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안에서 서열 효과나 집단사고, 더 나아가 (슬프게도) 젊은 여성들을 향한 성적 학대 같은 문제가 일어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샘 뱅크만 프리드는 장기주의에도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었다. 그가 만든 ‘퓨처 펀드(Future Fund)’에서, 맥어스킬 등 효율적 이타주의 인사들을 요직에 앉혀 “AI가 폭주해 세상을 멸망시킬 리스크, 혹은 소행성이 지구를 부술 리스크” 같은 데 대응한다며 나섰다.

효율적 이타주의 입장에선 ‘세상을 구하는’ 데 쓸 10억 달러를 샘 뱅크만 프리드에게서 건네받은 것이 꿈만 같았을 터다. 하지만 이게 결국 효율적 이타주의의 파멸 씨앗이 됐다.

퓨처 펀드 쪽 효율적 이타주의자들도 샘 뱅크만 프리드에 대한 경고를 예전부터 여러 차례 받았는데, 정작 그의 거대한 금융 사기가 밝혀지고 나자 펀드가 순식간에 붕괴했고, “우리는 리스크 전문가”라는 효율적 이타주의의 포즈도 한순간에 무너졌다. 경제학자 타일러 코웬(Tyler Cowen)은 이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퓨처 펀드 주변 사람들 누구도, 정작 퓨처 펀드 자체가 멸망할 리스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것도 내부자들이나 다름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그런 이들이 과연 훨씬 더 복잡하고 먼 미래의 ‘인류 멸망 리스크’를 제대로 예측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실제로 존재론적 위기의 근본 원인은 대부분 인간의 자만심과 불완전성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이론적으로는 자극적이고, 실제로는 파국적인. 이쯤이면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충분히 깨달았으리라.


내 결정이 실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수많은 똑똑한 사람들이 전 세계 여기저기서 효율적 이타주의를 표방한다. ‘우리가 정말로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는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테크 재벌 중 일부는 아마 영영 닿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들 중에는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마인크래프트”하듯 주무르려고 드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리고 언제든지 “당신 말이 맞습니다”라고 추종해줄 사람들을 돈으로 살 수 있다.

효율적 이타주의 지도부 중 일부는 아직 희망이 있을 수도 있다. 토비 오드는 이제 “가장 큰 선행을 하겠다는 욕심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수학적 증명을 찾았다 하고, 홀든 카노프스키도 “효율적 이타주의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그들이 훨씬 더 투명한 태도를 취한다면, 조금은 신뢰가 회복될지 모른다. 예컨대 기브웰이 “X달러로 몇 명의 목숨을 구한다”라는 간판을 내세운다면, 그 옆에 “X달러로 몇 명이 피해를 입거나 죽을 수도 있다”는 추정치도 함께 공개하는 식이다. 맥어스킬 같은 철학자들도 “우리가 어떤 돈을 어디서 얼마나 받았는지 전부 투명하게 공개하고, 왜 그게 인류에게 영원한 선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는지” 낱낱이 밝힌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투명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샘 뱅크만 프리드의 회사는, 속았던 투자자들에게 돈을 되돌려주어야 할 책임을 지게 됐다. 그렇다면 기브웰이나 효율적 이타주의 기관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기브웰이 추천하는 자선사업으로 인해 혹시 피해를 본 빈곤층이 있다면, 그들에게 문제를 제기할 통로가 열려 있을까? 또는 기브웰을 “정말 목숨을 살려주는 줄 알았다”며 기부했던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말해줄까? 효율적 이타주의 카운슬링 서비스를 믿고 경력을 바꾼 젊은이들 중, 이제 와서 그 경로를 추천받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보상해야 할까? 적어도 사과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진짜 희망을 거는 건, 정말로 ‘세상을 개선하고 싶다’는 열정으로 가득한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빈곤 완화든, 전염병 대비든, AI 안전이든 뭔가 의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분명 똑똑하고 재능 있다. 언젠가는 이들이 책임 있는 위치로 올라갈 텐데, 그때 그들의 철학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

내 생각에 우선 필요한 건, 거창한 철학 이론이 아니라 “내 결정이 실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똑바로 들여다보는 태도다. 내가 발리에서 겪은 것처럼, 결국 다른 사람도 우리와 똑같이 소중한 삶을 살고 있음을 실감해보는 거다.

물론 대학 시절의 짧은 경험만으로 나중에 큰 결정을 내려야 할 때까지 줄곧 바른길을 갈 수 있을지는 장담 못 한다. 그래서 두 가지 자가 점검법을 제안해본다.

첫째, “가장 소중한 사람(dearest) 테스트”.

큰 결정을 내릴 때,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부모, 파트너, 아이, 혹은 친구—을 앉혀놓고 눈을 마주 보며 말해보자. “내가 지금 내리는 결정이,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줄 거고, 누구에겐 해가 될 수도 있어. 나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소중하다고 믿어. 그리고 내가 해치게 될지 모를 그 ‘누군가’가 바로 당신이 된다고 해도, 난 이 결정을 고수할 거야.” 라고.

둘째, “거울 테스트”.

거울을 보고,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고, 그게 다른 사람들의 삶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를 설명해보자. 그리고 “이 결정 때문에 피해 보거나 죽을 수도 있는 ‘그 사람’이 바로 나여도, 나는 이 선택을 할 것인가?”라고 자신에게 물어보자.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만이라도 책임져보자는 의미다.

어쩌면 어떤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은 “내가 하는 일이 워낙 커서, 내 목숨보다 다른 이들이 중요하진 않다”는 생각을 여전히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런 생각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인생 한 사람분이 몇 사람의 목숨과 맞먹는지” 솔직히 말해보자. 혹은 아예 “내 가치 대비 다른 이들의 가치는 몇 배나 차이가 나는지”를 본인 웹사이트에 공개하고, 댓글 달릴 수 있게 열어두고. 자신이 지금껏 죽게 만든 사람의 숫자까지 직접 써넣고 말이다.

내 친구 애런은 훌륭한 철학자이자 평생 서퍼(surfer)다. 12년 전쯤 인도네시아 니아스(Nias) 섬에 갔다가 라군드리 베이(Lagundri Bay) 인근 마을에 올라갔는데, 그 뒤로 해마다 찾아가 현지인과 관계를 쌓았다. 그중 다모(Damo)라는 현지 지도자와 친해졌고, 지금은 서로 통화도 자주 한다.

애런은 자신이 그 섬에 완전히 녹아들 수 없다는 걸 잘 알지만, 다모가 “우리 마을에 수조와 화장실을 설치하자”고 주민들을 설득했을 때 기획 작업을 도왔다. 그리고 책 계약금을 받으면, 해마다 조금씩 그 돈을 마을에 가지고 들어간다.

억만장자도 없고, 거창한 홍보도 없고, 영웅이 되려는 기세도 없다. 애런은 어떻게든 자신의 권한을 다모와 섬 사람들에게 넘기려 애쓰고 있다. 물어보면 이야기를 해주긴 하지만, 자기가 무슨 위대한 업적이라도 한 양 떠들진 않는다.

그리고 그는 그 섬 공동체에 대해—우리가 보통 가까운 사람에게 느끼는—“책임감을” 느낀다. 어쩌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옆에 있는 ‘살과 피가 있는’ 사람들에게 져야 할 바로 그 책임감을.


  • 같이 읽기

효율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의 죽음 (번역)”의 1개의 생각

  1.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어떤 우리나라 판사님께서 쓰신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거기서 받은 감명과 정확히 반대되는 감각이네요.

    글로벌화의 광풍이 끝나가는 이 시기,
    냉정의 가면을 쓴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이타주의보다는
    이기주의의 가면을 쓴 츤데레 개인주의자들이 더 세상을 살만하게 만들고 있지 않나합니다.

    나와 내 주변을 못돌보는 사람이 어떻게 이역만리 타향의 고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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