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워크, 그 영화 같은 추락 (번역)

애덤 노이만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네오고딕 양식의 빌딩인 ‘울워스’ 빌딩의 57층에 있었다. 2013년 어느 금요일의 늦은 밤이었다. 위워크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였던 그는 그 건물의 30개 층을 그들의 부동산 임대사업에 추가 하려던 중이었다.

노이만은 당시 최고의 성과를 내던 주요 임원 셋과 함께 있었다. 이미 술을 몇 잔 걸친 뒤였다. 텅 빈 건물 안에서 그들은 복도에 맥주병을 던졌다. 맥주병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복도를 굴러 내려갔다. 노이만과 일행은 건물 꼭대기로 올랐다. 가드레일도 없고, 울타리도 없는 텅 빈 곳에, 그저 만취한 임원들이 불안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저는 그와 함께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놀라게 할 거야’라고 자신했죠.” 당시 위워크의 편집국장 해리슨 웨버의 회상이었다. 

노이만은 바닥을 굴러다니던 맥주병을 집어들었다. 안에는 마시다 남은 맥주가 찰랑거렸다. 노이만은 같이 있던 직원들에게 한 모금씩 마실 것을 요구했다. 해리슨 웨버를 제외한 모두가 돌아가며 마셨다. “그건 마치 충성 서약 같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그가 얼마나 교조적인지 느낄 수 있었죠.”


지난 80일동안 위워크는 스타트업 역사상 유례가 없는 추락을 겪었다. 위워크가 신정한 주식공개(IPO)는 진행되지 않아 비웃음을 샀다. 투자자들은 노이만이 갖고 있던 몇 가지 재무적인 특권조항에 대해 알게 되었다. 회사의 기업가치는 폭락했다. 노이만은 자리에서 내려와야했고 주식공개는 철회되었다. 한 때 470억 불의 기업가치로 평가받던 위워크는 고작 70억 불의 가치만 인정받았다. 소프트뱅크는 구조조정의 책임을 떠안았다. 

하지만 위워크의 추락에서 가장 극적인 지점은 노이만의 탈출이었다. 40세의 노이만은 그의 지분을 소프트뱅크에 넘기며 10억 불 이상을 챙겼다. 추가로 1.85억 불의 컨설팅 대금까지 받았다.(주: 우리 돈으로 도합 1.4조 원 정도다) 그가 초래한 재앙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그에게 투자했던 이들과 곧 해고될 위워크 직원들의 머릿 속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어떻게 노이만은 실패조차도 그렇게 화려한가.

그 답은 울워스 빌딩의 꼭대기에서 웨버가 순간 보아버린 것,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카리스마와 리스크를 즐기는 극단적인 성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에서 자란 노이만은 투자자들에서부터 기자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을 매혹해서 그의 비전인 ‘자본주의의 키부츠’를 글로벌 규모로 만들어내는 매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빠르고 멈추는 법이 없다. 에너지가 넘친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분명히 그의 스타일과 외모 역시 그의 행보에 도움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195센티에 달하는 이 사람은 말 그대로 그를 둘러싼 공간을 지배했다.

노이만은 시대에게 선택 받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했다. 위워크는 사무실이라는 공간을 인격의 확장으로 재정의했다. 일과 놀이가 하나의 세계로 엮이는 그의 비전에 공감하는 이들은, 위워크 역시 우버나 리프트처럼 당장은 수익성이 없어도 조만간 경제성을 밝혀낼 것이라 생각했다.

애덤 노이만은 위워크 멤버들이 직업, 가족,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최초의 ‘실재하는 소셜 네트워크’를 매혹적으로 이야기했다. 웨버는 “사실 그건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저 규칙적인 생활을 돌려 말하는 것 뿐이죠.”라고 말했다.

하지만 같은 말도 노이만이 말하면 왠지 혁명적인 메시지처럼 들렸다. 더 많은 이들이 위워크의 비전에 공감하고 돈을 내며 위워크의 기업가치는 급증했다. 하지만 위워크와 노이만이 대기권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버린 건 소프트뱅크의 최고경영자 손정의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손정의는 노이만과 비슷한 면이 많았다. <스타워즈>의 요다처럼 ‘포스를 느끼는’ 그는 수 세기 뒤의 미래를 생각하며 감각적으로 움직인다. 소프트뱅크가 결성한 비전펀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부다비 등에서 나온 1,000억 불 이상의 자본으로 구성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테크 투자 펀드다.

그들이 크게 베팅한 것 중 우버를 비롯한 몇몇 케이스는 결과가 좋지 않았지만, 손정의는 그가 과도한 밸류에 돈을 넣었다는 의견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지금 투자환경을 ‘거품’ 혹은 ‘위험’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기술과 혁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손정의가 지난 7월 닛케이 인터뷰에서 말했다. 

전설적인 일화 하나. 2017년 노이만은 손정의와 위워크 본사에서 만났다. 함께 본사 주변을 걸으며 44억 불의 투자를 유치하는데 든 시간은 단 12분이었다. 그 후 의기양양한 노이만은 기사 딸린 흰 마이바흐를 타고 랩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채 아이패드에 그가 손정의가 맺은 계약서를 띄워놓고 그의 동네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더 미친, 더 빠른, 더 커다란, 더, 더, 더’

노이만과 함께 일하던 위워크의 직원들에게는 소프트뱅크와의 계약이 주변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일이었다. 그들은 위워크를 손정의 이전과 이후로 나누었다. 그 투자는 그저 잘 나가는 유니콘 기업을 거대한 야망을 가진 무언가로 바꾸어버린 셈이었다.

튀는 창업가들이 아무리 많다지만 노이만의 기행은 정도를 넘어선 일이었다. 그는 사무실을 맨발로 걸어다니기 시작했고, “코첼라+ 와일드 와일드 컨트리+ 프래터니티 파티”라 이름 붙인 이상한 여름캠프를 열었다.

노이만은 직원들에게 데낄라 돈 훌리오를 샷으로 마시고 20시간씩 일하게 했다. 새벽 두시의 미팅은 예사였다. 그는 일하며 대마초를 피우게끔 했다. 소풍 온 것처럼 캠프파이어 주변을 돌며 춤추게 하고 대마초와 데낄라를 강요했다. 심지어 술을 마시지 않는 이들도 그를 따라하게 했다. 자레드 쿠시너 역시 백악관에 들어가기 전에는 필라델피아의 부동산을 알아보며 노이만을 따라 마셨다.

노이만은 “집”을 컬트적인 익살로 채워넣는데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눈에 위워크는 단순히 사무공간을 공유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는 위워크에서 콤부차, 콜드브루 커피 뿐 아니라 공동체 의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공간 뿐 아니라) 에너지와 문화를 위해 우리에게 옵니다” 노이만은 주장했다. 

노이만은 사람들이 ‘누구도 혼자라고 느끼지 않기 때문에’ 자살율이 낮은 공유주거 위리브WeLive를 꿈꿨다. 그는 세계의 고아를 위한 피난처이자 학교인 위그로우WeGrow를 상상했다. 그가 이야기했던 것들은 위뱅크WeBank, 위세일WeSail, 위슬립WeSleep에 이르렀다. 항공사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의 사업은 여기저기서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그의 웅대한 계획은 위워크를 테크 스타트업을 초월해 보이게 만들었다. 실제로 위워크의 직원 상당 수는 거의 메시아에 가까운 소명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노이만은 명상에도 열심이었다. 그의 아내 레베카 펠트로 노이만은 구프의 창업자이자 지바묵티 요가의 공인 수행자인 기네스 펠트로의 사촌이기도 하다. 레베카 노이만은 “제 사명은 결코 돈을 많이 버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제 사명은 남편과 함께 어떻게 하면 이 좋은 영향력을 세상에 퍼트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노이만의 소명에 영향을 가장 크게 준 사람 중 하나는 손정의다. 그는 노이만과 2016년 인도에서 열린 나렌드라 모디 총리 주최의 기업가 모임에서 서로 만났다. 

일본 최고의 부자이지만 겸손하다 알려진 손정의와, 세계 최초로 조만장자이자 대통령이 되고 싶어하는 노이만은 서로 달라도 너무 달랐다. 손정의는 대학 시절 전자 번역기를 개발해서 샤프에 매각했고, 소프트웨어 유통을 하는 소프트뱅크를 창업했다. 노이만은 창업 초기 바퀴가 달린 하이힐이나 ‘말을 할 수 없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아기용 무릎보호대 등의 사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아웃사이더였다. 노이만의 부모는 그가 7살일 때 이혼했고, 모델 활동을 하는 여동생 아디 노이만을 따라 뉴욕으로 오기 전까지는 키부츠와 공동시설 등을 전전했다. 손정의 역시 일본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한국계 일본인으로, 그가 10대에 캘리포니아로 이주해오기 전까지 차별의 아픔을 겪었다. 

노이만처럼 손정의도 그의 직감을 우선해서 반대의견을 무시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2000년 그는 중국의 전자상거래 회사인 알리바바에 2천만 불을 투자했다. 꽤 이른 시기에 그 투자가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알리바바의 창업자 잭 마의 눈에서 ‘반짝거림’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2천만 불은 현재 1,000억 불이 되어있다.

손정의에게 누군가가 4천만 불을 투자해달라고 한다면, 손정의는 “만약 내가 (그의 열 배인) 4억 불을 드린다면 뭘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손정의의 독특한 스타일은 다른 이들을 숨막히게 했지만, 애덤은 그 이상이었다. ‘4억 불? 추가로 40억 불은 어떻습니까. 제가 당신을 위해 이런 걸 할 수 있는데요.’라고 말할 만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노이만은 손정의와 함께 도쿄에서 스시를 먹고, 캘리포니아의 가장 비싼 저택에서 저녁을 함께 했다. 손정의는 기타 모양의 거실로 유명한 노이만의 코르테 마데라 저택에 들르곤 했다. 

위워크에 수십억 불을 투자한 손정의의 결정은 주주들을 흥분시켰고 비전펀드의 파트너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고 생각하게 했다. 동시에 노이만을 현실과 멀어지게 만들었다. 한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애덤과 단 10분 만난 것으로 44억 불의 수표를 끊어주었습니다. 완전히 미친 짓입니다. 그건 ‘이 자본을 가장 신중하게 쓰세요’ 따위가 아닙니다. 차라리 ‘더 미친, 더 빠른, 더 커다란 것들을 더, 더, 더’ 하라는 메시지에 가깝죠.”


‘당신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야’

손정의가 ‘더 광적으로’ 하라고 떠민 것에 힘입어 노이만은 위워크를 전 세계적으로 확장하는데 매진하며 그의 고상한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고삐가 풀린 그의 야망은 회사의 손실을 증가시키고 직원과 투자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작년 위워크는 걸프스트림 G650 비행기를 전용기를 6천만 불에 구입했다. (이건 회사 전체의 2주간 손실 비용과 비슷하다) 노이만은 자신의 뉴욕 사무실에 적외선 사우나와 수영장을 만들었다. 이해관계의 충돌과는 관계없이 자신이 갖고 있던 수백만 불의 건물들을 회사에 임대했다.

신비주의에 한층 심취한 노이만은 회사의 이름을 위 컴퍼니We Company로 바꿨다. 위워크의 상장신청 서류에는 ‘커뮤니티’라는 단어만 150번 넘게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위We에 대한 브랜드를 개인이 소유하며 그에 대한 사용료를 회사로부터 590만 불이나 챙겨갔다. (물론 나중에 그걸 다 돌려줬지만)

그는 직원들에게도 유해했다. 노이만의 전 비서실장이었던 메디나 바르디는 최근 연방법원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노이만은 그의 임신과 출산 휴가를 ‘방학’과 ‘퇴직’이라 조롱했다고 한다. 그리고 노이만은 항상 회사의 전용기를 섹시한 여성과 타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임신 이후 노이만과 출장을 갈 수 없었다. (위워크의 대변인은 회사가 ‘차별에 대한 무관용’을 갖고 있다며, 이 사안에 대해 진지하게 대응할 것임을 말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월스트리트와 언론사의 많은 이들은 위워크의 사업 모델을 조롱해왔다. 지난해 배니티 페어는 위워크가 200억 불짜리 사상누각을 짓고 있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일부는 노이만이 2017년 바룩 대학의 연설에서 아내 레베카와의 첫 데이트를 이야기한 것이 적절했는지 의심했다.

“아내는 제 눈을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친구야, 넌 지금 완전 쓰레기야’. 그리고 그의 입에서 이어진 말은 ‘네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거짓이야’였습니다.”


위워크, 회생할 수 있을까

노이만이 비범한 비전을 가졌다는 것에 이견을 제시할 이는 누구도 없다. 위워크는 사무실 한 개로 시작한지 9년 만에 약 110개 도시의 4,500만 평의 공간에서 52만 7천 명의 세입자 아니 ‘회원’을 거느릴 정도로 성장했다.

런던, 뉴욕, 워싱턴에서 단일 규모로 가장 큰 사무실 공간을 점유한 곳이 위워크다. 위워크의 멋진 공간은 공유경제와 기업가정신과 동의어가 되었다. 그들의 비전은 ‘Thank God It’s Monday!’ 티셔츠로 완성된다. IBM, 마이크로소프트, 세일즈포스와 같은 대기업들도 직원들을 위워크로 입주시켰다. 

제이피모건 체이스의 CEO 제이미 다이먼,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야 나델라, 비상장 주식 재벌 헨리 크래비스와 같은 인사들이 위워크 사무실에 오면, 노이만은 그들을 어떻게 환영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런던의 포스트모던 폴트리 빌딩, 파스텔 톤 타일이 있는 오래된 아편공장을 개조한 위워크의 프리미엄 공간에서 거대한 터치스크린을 통해 공간을 작동시켰다. 노이만은 VR로 렌더링하는 위워크의 시각화 책임자를 소개했다. 한 순간에 방문자들은 파리나 도쿄에 위치한 미래의 위워크 공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회사의 최고 성장 책임자인 데이브 파노는 2017년 포브스에서 ‘건물주들이 단순히 알루미늄을 파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아이폰을 만듭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손정의는 노이만을 보호해왔다. 9월 중순 IPO가 무산되고 노이만이 외부로부터 사임 압박을 받을 무렵, 손정의는 그를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의 랭험 호텔에서 열린 비전펀드 모임에 불렀다. 존 레전드가 노래하는 자리였다. 당시 대화 내용을 브리핑한 사람에 따르면, 노이만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나 메인 테이블에 앉아 있는 걸 보는 건 손정의에게 고역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결국 노이만은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손정의는 회사의 수익성과 지배구조의 강화에 대해 엄중히 강조했다. 

노이만은 9월 24일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내려왔다. 10월 비전펀드에 대한 컨퍼런스 콜에서 손정의는 그 창업자에게 과한 신뢰를 보낸 것에 대해 사과했다. 10월 22일 소프트뱅크는 위워크의 지분 80퍼센트를 사들였다. 그 다음날 소프트뱅크의 COO였던 마르셀로 클로르는 위워크의 새로운 책임자가 되어 직원들과 타운홀 미팅을 가졌다.

녹취록에 이런 얘기들이 있다. “정리해고가 있을 예정입니까?” “네” “얼마나요?” “그것은 아직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노이만에게 지불한 금액에 대해서는 노코멘트 하고 싶습니다”라고 얘기했다. 

비전 있는 이로 칭송받든 사기꾼으로 폄하되든 노이만은 위워크에 대한 강력한 의결권을 유지해왔다. 한 때 그의 의결권은 주당 20표에 달했다. 소프트뱅크는 그의 의결권을 회수하기 위해 큰 대가를 치러야했다. 

“애덤 노이만은 앞으로 회사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고 이사회에 참여하지도 않을 예정입니다. 다만 저는 그의 지식을 일부 활용할 계획입니다.” 마르셀로 클로르는 말했다. 

월스트리트의 사람들 중 몇은 아직 위워크의 추락이 멈추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10월 30일, 헤지펀드 매니저 빌 애크먼은 회사의 가치가 ‘제로’가 될 가능성이 꽤 높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많은 애널리스트들은 위워크가 여전히 사업 가능한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 모델은 사무공간 임대라는 기본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전에 말했듯 학교나 고아들을 위한 거대한 비전이라기보다는 임대 계약자들에게 쾌적한 분위기와 성능 좋은 와이파이를 제공하거나 하는 것들.

“회복의 여지가 있을까요? 아마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위워크가 추구한 방식은 아닙니다.” 이 회사를 깊이 연구한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노리 제라도 리에츠가 말했다. 그는 위워크가 “과도한 계획’을 넘어서야 할 것이라 덧붙였다. 

여전히 노이만을 사업가로써 신뢰하는 사람들도, 당혹스럽지만 있다. 10월 15일 비즈니스 인사이더와의 인터뷰에서 세일즈포스의 마크 베니오프는 그를 지지했다. “사실 저는 그가 제가 만난 가장 위대한 기업가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열정은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놀라운 비전을 가지고 있죠. 훌륭한 사람들이 있는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엄청난 브랜드도 만들어냈죠. 그렇지 않나요?” 그는 덧붙였다. “불행히도 그가 다시 처음부터 할 수 있었다면 회사의 몇 가지는 바꾸고 싶었을 수도 있죠”

노이만은 최근 몇 주 동안 그리니치, 몬탁, 웨스트체스터 등을 왕래하며 법적인 절차들을 다루고 있다. 별 일 없이 조용하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공언하던 사람은, 이제 그 책임을 지는 중이다.

우버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스타트업으로 손꼽히던 위워크는 어느 회사와도 다른 독특한 사업모델과 문화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마치 종교집단의 교주와 같은 카리스마를 가진 창업자, 애덤 노이만이 있습니다.

위워크가 잘나가던 시절엔 이 컬트적 문화가 카리스마와 힙스터라고 여겨지기도 했습니다만, 추락하고 있는 지금은 달리 보입니다. 애덤 노이만에 한 발 앞서 컬트를 만들고, (아직 유지하고 있는) 에반 슈피겔의 스냅챗이 생각나는 글이네요.

편집자 뤽

위워크, 그 영화 같은 추락 (번역)”의 1개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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