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까요. ‘국민학교’가 존재하던 80년대, 90년대만 해도 TV 속 ‘과학자’는 대통령만큼이나 멋진 꿈이었습니다. 브라운관에선 연일 ‘세계 최초’ 기술 개발 소식이 흘러나왔고, 우리는 ‘과학 기술 입국’이라는 네 글자에 가슴이 웅장해지는 시대에 살았죠.
공학도들의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그런 시절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2025년 대한민국은, 수능 만점자가 소신껏 컴퓨터 공학부를 선택하자 온 동네 어른들이 “점수가 아깝다”, “왜 의대 안 갔냐?”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공대 가기엔 점수가 아깝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이 글은 “요즘 애들은 꿈이 없다”는 꼰대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성세대들이 몸으로 겪어온, 그리고 어쩌면 자식 세대에게 똑같이 물려주고 있는, 이 기이하고도 슬픈 현실에 대한 고백서에 가깝습니다.
지난 목요일 KBS에서 방영되었던, 다큐 인사이트 인재전쟁 2부 – ‘의대에 미친 한국’ 이야기입니다.
1. 우리는 30년 전, 이미 미래를 달리고 있었다
이야기는 믿기 힘든 사실 하나로 시작해야겠습니다. 대한민국은 1993년, 지금으로부터 무려 30여 년 전에 이미 빗길 고속도로를 시속 100km로 달리는 자율주행 자동차를 만들었습니다.
네, 오타가 아닙니다. 테슬라가 세상에 나오기도 한참 전, 내비게이션도 귀하던 시절에, 한 교수 연구팀이 만든 무인 자동차가 이미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이 기록한 95km/h를 뛰어넘는 세계 최고 기록이었죠. 이 기술을 배우겠다며 벤츠와 폭스바겐 기술진이 한국으로 날아왔고, 프랑스는 이 기술에 충격받아 자국의 자율주행차 개발을 시작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80년대에는 정부가 ‘산업 기술 개발’을 외치면 전국민이 한마음으로 움직였고, “지금 우리가 먹고사는 게 바로 그때 투자해놓은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 성과는 달콤했습니다.


90년대에는 “공대에 가면 성공할 수 있고, 재밌는 거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사회 전반에 팽배했습니다. ‘세계 최초 CDMA 상용화’, ‘128MB 플래시 메모리 세계 최초 개발’ 같은 뉴스는 우리에게 자부심 그 자체였죠. 우리는 한때 그렇게 미래의 가장 앞자리에서, 그것도 아주 신나게 달리고 있던 나라였습니다.
2. 시스템 붕괴의 서곡: IMF가 남긴 지독한 트라우마
그랬던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다큐는 그 변곡점으로 1997년 IMF 외환위기를 지목합니다. 우리 80년대생들의 청소년기를 관통했던, 부모님의 한숨이 유난히 깊었던 바로 그 시절이죠.
IMF는 단순히 경제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믿음의 시스템’을 송두리째 파괴한 거대한 트라우마였습니다. ‘평생 직장’이라는 신화가 무너졌고, 기업들은 가장 먼저 돈 안 되는 연구소와 개발직부터 잘라냈습니다. “기술이고 나발이고, 당장 내일 먹고 살 길이 막막한데”라는 공포가 사회 전체를 지배했습니다.
이때부터였습니다. ‘성장’과 ‘도전’이라는 단어는 ‘불안’과 ‘위험’이라는 말로 대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리를 파고든 유일한 가치는 바로 ‘안정성’이었죠. 무슨 일이 있어도 잘리지 않는, 라이선스로 보호받는 직업. N수를 해서라도 가져야하는 소위 ‘사’자 직업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다큐 속 한 전문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외환 위기 이후 한국 경제가 효율성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강력하게 자신들의 지위를 보호할 수 있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으로 2분화됐습니다. 그 지위 경쟁의 정점에 의사라는 직업이 만들어졌죠.” 이공계 위기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3. 2025년 대한민국의 처참한 성적표
그렇게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의 성적표는 어떤 모습일까요?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숫자는 너무나도 처참합니다.
| 지표 (Indicator) | 대한민국 현주소 (따끔한 팩트) | 비교 대상 (Comparison) | 시사점 (뼈 때리는 해석) |
| SKY 공대 자퇴율 | 정시 합격생의 약 43%가 등록 포기 | (비교 불가) | 최고 대학 공대 = ‘의대 재수 학원’ 전락 |
| 인재 유출 | 美 고급인력 비자, 인구 대비 1위 | 인도는 인재 ‘리턴’ 현상 발생 | ‘돌아올 이유’도, ‘머물 이유’도 없는 나라 |
| 박사급 일자리 | 박사 1명당 신규 일자리 0.5개 미만 | 90년대: 1명당 2.6개 | 꿈을 펼칠 무대 자체가 사라짐 |
| R&D 투자 | GDP 대비 세계 최상위권… 그러나? | 정권 따라 오락가락, 단기 성과 집착 | 일관성 없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
| 박사 후 연구원 | 고용 불안, 단기 계약직 전전 | 미국 빅테크: 연봉 3~40만 불 (최대 5배) | ‘보상’ 없는 ‘애국심’ 강요 |
서울대 공대 학장님은 “850명이 입학하는데 졸업하는 학생은 750명이 되지 않는다”고 탄식합니다. 5년 전만 해도 100명 이하였던 이탈자가, 최근에는 매년 100명 이상씩 늘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 100명은 어디로 갔을까요? 상당수가 ‘의대’라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의대’는 그 어떤 전공보다, 심지어 대학교의 이름보다 우선하는 절대 목표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학부모들은 본인들의 불안과 욕망을 아이들의 ‘의대 진학’에 불태웁니다. 그 욕망은 돈이 됩니다. 사교육 시장이 급격히 커지고, 있는 이들을 위한 리그로 재편됩니다.

인재들은 더 나은 기회와 보상을 찾아 해외로 떠납니다. 한국은 미국에 가장 많은 고급 인력을 보내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인도 인재들은 자국 시장이 커지자 다시 돌아가는데, 우리는 ‘돌아가면 연봉 삭감’을 걱정해야 하는 신세죠. 박사 학위를 따도 일자리가 없어 계약직을 전전하는 현실은, 더 이상 비밀도 아닙니다.
4. 몇 가지 질문과 더 따끔한 답변
이쯤 되면 몇 가지 질문과 반론이 떠오르실 겁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이 복잡한 문제, 좀 더 깊게 파고 들어가 보죠.
“아니, 그래도 우리나라 R&D 투자, GDP 대비 세계 1위라면서요? 돈은 제대로 쓰고 있는 거 맞나요?”
네, 맞습니다. 정부도 알고 있고, 돈을 써요. 슬프게도 돈은 엄청나게 씁니다. 하지만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다큐 속 한 스타트업 대표의 말이 핵심을 찌릅니다. “정권마다 컨셉이 있어요. 갑자기 AI에 투자한다 그러면 AI가 막 떴다가, 다른 거로 몰려가면 여긴 또 지원 못 받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꾸준히 투자해야 성과가 나오는 과학 기술 분야를, 5년 단임 정권의 ‘컨셉’에 맞춰 단기 성과 위주로 투자하니, 제대로 된 생태계가 자랄 수 없는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건, 공학이라는 건 되게 비용과 연구와 투입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분야”인데 말이죠. 일관성 없는 투자는 ‘투자’가 아니라 ‘낭비’에 가깝습니다.
“요즘 애들이 그냥 도전정신이 부족하고, 안정적인 것만 좇는 거 아닌가요? 우리 땐 안 그랬는데.”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가혹하고, 또 무책임한 진단입니다. ‘도전’은 최소한의 ‘안전망’이 있을 때나 가능한 단어입니다.
박사 학위를 따도 계약직을 전전하고(“박사 딴다고 예전처럼 대우해주지 않아요”), 인생을 건 연구가 단기 과제가 끝나면 공중에 뜨고(“과제 자체가 단기적으로 계약이 끝나면 끝나는 거여서”), 스타트업을 해도 정권 따라 지원이 끊기는 나라에서, 젊은이들에게 “맨땅에 헤딩하라”고 말하는 건 기성세대의 폭력일 수 있습니다.
“공대는 가서 뭐 먹고 살려고 그러냐?”는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혔다는 한 학생의 이야기는,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만든 ‘실패에 대한 공포’를 보여줍니다.
“결국 의사들이 돈을 너무 많이 버는 게 문제 아닌가요?”
의사의 높은 소득은 이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IMF 이후 우리 사회 전체가 ‘안정성’이라는 단 하나의 가치에 목을 매게 되면서, 의사 면허라는 가장 강력한 ‘방어막’을 가진 직업에 가치가 몰린 것뿐입니다.
한 학생은 “의사가 사회적 지위도 높고, 버는 돈이 일반 SKY 나오는 것보다 몇 배씩 훨씬 벌고…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추천받은 직업”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사회가 어떤 가치를 더 높게 쳐주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대목이죠.
만약 의사 연봉을 인위적으로 깎는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공학도에 대한 처우와 미래가 나아지지 않는다면, 똑똑한 인재들은 그냥 의대 대신 미국행 비행기를 탈 겁니다. 문제의 본질은 ‘누가 많이 버느냐’가 아니라, ‘도전하는 사람들이 왜 제대로 된 보상과 안정을 얻지 못하는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다큐는 교훈적인 결론을 내리는 대신, 우리에게 씁쓸한 화두를 던집니다.
한때 우리는 ‘과학 기술’이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들었고, 우리에게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주었죠. 하지만 IMF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우리는 꿈 대신 ‘안정’을 선택했고, 그 결과는 30년의 퇴보와 인재 유출이라는 처참한 성적표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 우리는 다시 한번 ‘도전’과 ‘혁신’의 가치에 베팅하는 사회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안정’이라는 달콤한 독배를 우리 자식 세대들에게도 똑같이 물려주게 될까요?
- 수능 만점자가 소신껏 공대를 선택했을 때, “점수가 아깝다”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다”고 진심으로 말해줄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 “노력하고 얻은 성과에 대한 보상이 그거에 맞게만 따라오면 합의됩니다, 갑니다. 그게 안 되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은.” 이 한 연구자의 절규에, 우리는 과연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아, 2주전 공개된 이 다큐의 1부는 중국 얘기였습니다. 같이 읽어보면, 속이 꽤 쓰립니다.

- 참조: KBS 다큐 인사이트 인재전쟁 – 2부 의대에 미친 한국
- 기획& 편집: 뤽 (스크립트 정리 릴리스, 초안 작성 제미나이 2.5)

어쩌면 트랜스휴머니즘이 이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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