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소소한 일상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하는 일은 예전만큼 자연스럽지 않아졌습니다.
아침 식사 사진을 찍어올리는 것은 소셜 미디어가 형성한 인터넷의 원형이었습니다. 굳이 공개적으로 올릴 필요가 없지만 책임감 — 혹은 의무감 — 마저 느끼고 게시하는 콘텐츠였죠. 아침에 먹은 음식 사진을 찍어 올리는 일은 트위터(Twitter)와 인스타그램(Instagram) 초기에 우리가 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그게 참 새로웠죠.
어느 순간 우리는 인생의 가장 사소한 순간을, 기꺼이 그걸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던져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아침 식사 사진은 소셜미디어의 어떤 유토피아를 상징했습니다.
전 세계 수십억 명의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일상 — 식사, 반려동물, 샤워하며 떠오른 생각 — 을 거의 아무 제한 없이 인터넷에 흘려보내면, 그것은 흥미롭고, 심지어는 생명력 넘치는 무언가가 되었습니다.
참여와 상호작용은 아마추어리즘과 일상성, 그리고 콘텐츠에 대한 실력주의를 찬미하는 거대한 흐름이었습니다. 누구든, 무엇이든, ‘올리는 방식’만 좋다면 흥미로울 수 있고 심지어 전 세계적인 바이럴이 될 수도 있었죠.

하지만 요즘은 그 아침 식사 사진들도, 그걸 둘러싼 이전의 온라인 풍경이 드뭅니다.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예전만큼 많지 않죠. 사실 이제는 별로 말이 되지 않는 행동처럼 보기도 합니다. 아니 애초에 그게 말이 됐던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소셜미디어가 등장한 지 15년이 넘은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일까요? 거대 예산을 움직이는 인플루언서와 크리에이터의 홍수, 지구 반대편 분쟁의 끔찍한 참상을 알리는 외신들,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이미지·영상·텍스트, 플랫폼 스스로 사실상 용인한 트롤링과 사이버불링 — 사용자들의 깊은 내면을 자극하는 콘텐츠 — 가 넘실대고 있습니다.
이런 지평에서, 우리 일상의 작은 조각 같은 건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전처럼 무언가를 올리지 않아요.
최근 워싱턴 D.C.에 사는 제 바텐더 친구가 어느날 아침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몇 장의 밝은 셀카를 올린 것을 봤다. 조금 뒤에 보니 그 사진들은 사라져 있었습니다 — 계속 그걸 곱씹던 그가 스스로 삭제한 것이었죠.
나중에 그가 말했다. “세상에 온갖 일이 일어나는데, 저혼자 좋다고 그런 걸 올리면 제가 사회적 감수성이 떨어지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걱정돼요. 괜히 의식이 되더라구요.”
세대적 요소도 있을 겁니다. 소셜미디어와 함께 자란 밀레니얼은 중년으로 접어들며 삶에 더 많은 프라이버시가 생겼습니다. 배우자와 아이가 생기면, 온라인에 사생활을 공개할 유인이 예전만 못할 수 있지요.
30대 변호사 에마 훌스(Emma Hulse)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프라이버시 공유를 전보다 더 경계하는 것 같아요. 하긴 10년 전 우리가 얼마나 많이 올려댔는지를 생각하면, 이는 어쩌면 필요하고 건강한 조정이겠죠.”
그러나 수십 명과 나눈 대화에서는 수많은 Z세대와 더 어린 사용자들도 자신의 삶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데 거부감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들 역시 ‘포스팅 권태’를 겪고 있었죠.

24세 카니카 메흐라(Kanika Mehra)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또래 애들은 다들 어떤 관음증이 있어요.” 계속해서 피드를 스크롤하기만 하지 포스팅은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제 주변 애들은 남들에게 ‘보이는 것’을 원치 않고, 가끔 올리더라도 올리고 나면 이내 어떤 ‘포스팅 후유증’ 같은 것을 느끼거든요.”
17세 타릭 베차레비치(Tarik Bećarević)는 자신과 친구들은 이전 세대의 캐주얼한 소셜미디어 시대를 경험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인스타그램에 무언가를 올릴 때 캐러셀 이미지 순서를 어떻게 배치할지에 머리를 싸맵니다.
“솔직히 아침 식사 사진을 그냥 찍어 올린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어요. 굳이 올려야 한다면 포토덤프 6번째 슬라이드쯤?”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가 말한 ‘이상적 포토덤프’의 공식은 이랬습니다 – “단독 사진 한 장, 사회생활을 증명할 친구들과의 단체 사진 한 장, 그리고 예쁜 자연이나 음식, 혹은 독특한 취미 같은 것.”)
그는 또 “가까운 친구들끼리만 공유하는 비공개 계정조차 ‘자유로워 보이도록’ 큐레이션돼 있지, 실제로 자유로운 건 전혀 아니에요”라고 덧붙였습니다.
소셜미디어가 진화하면서 게시물에 대한 기대수준은 계속 높아졌습니다. 휘갈겨 쓴 트윗은 정성 들인 인스타그램 사진으로 대체됐고, 그것마저 틱톡(TikTok) 클립으로, 이제는 어지간한 TV 수준의 영상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인플루언서와 브랜드 계정이라면 조명과 아이폰 전용 삼각대에 투자하며 새로운 기준에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만, 나머지 사람들은 고작 아이폰 카메라 앱과 씨름할 뿐입니다.
뮤지션이자 온라인 아티스트인 맨 바틀렛(Man Bartlett)은 2010년대 초 ‘라이프캐스팅’이라 부른 활동의 개척자였습니다. 2011년 그는 포트 오소리티 버스터미널(Port Authority Bus Terminal)에서 24시간을 보내며 만난 사람들에 대해 실시간으로 트윗하고 온라인 팔로워들에게 여행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콘텐츠를 만들고 ‘겉핥기식 친밀(parasocial)’ 관계를 키워야 한다는 압박은 그에게 “유독하고 역겨웠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콘텐츠가 점점 헤비한 영상 위주가 되었습니다. 그건 제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매체가 아니었어요.”
요즘 그의 주된 활동은 신생 플랫폼 블루스카이(Bluesky)에 음악 프로젝트에 대한 짤막한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소셜미디어 생태계가 계속 분절되고 복잡해지면서 새로운 플랫폼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가운데 일부 사용자는 아예 이 전선에서 이탈했습니다. 어떤 이는 “이제 디스코드나 블루스카이 같은 새로운 서비스를 계속 배워가며 사용할 만큼의 에너지가 없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새로운 기술에 끊임없이 적응해야하는 피로감을 호소합니다. 소셜미디어 디자인 자체가 캐주얼 포스팅을 막고 있어요. 큰 숫자를 올리지 못하면 올린 이들 스스로 의미없다고 느끼게 하는 지표들, 인기 계정을 우선 노출하는 알고리즘 피드 — 그곳엔 일상이 아니라 일침, 도발, 자기 과시가 판칩니다.

조지아대학 학생 벤턴 윌리엄스(Benton Williams)는 “애초에 친구들의 게시물이 피드에 안 보여서 더는 근황 업데이트 역할을 하질 못해요”라고 말합니다. 인디 뮤지션 켈 플레밍(Kele Fleming)은 불만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알고리즘은 절대 우리 편이 아니죠.”
숨은 진주 같은 콘텐츠를 띄우던 예전과 달리, 피드는 이제는 자본의 뒷받침이 되는 거대 계정만 밀어줍니다. 내 친구들이 내 게시물을 볼 거라는 보장이 없는데, 계속 올릴 동기가 있을까요? 포스팅을 해도 알고리즘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면 저 공허의 무저갱 속에 파묻힐 뿐입니다.
그리고 포스팅에는 늘 ‘오글거림’ 혹은 ‘비난’의 리스크가 따릅니다. 갈수록, 묻히거나 — 더 나쁘게는 흑역사가 되거나 부적절해 보일 — 위험이 같이 커져요.
2020년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 시위 때 많은 개인·기업 계정이 어떤 프로파간다 게시물 외에는 올리기를 꺼렸습니다. 그 분위기는 요즘 이스라엘-가자 전쟁,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이슈 등의 사건 속에서 되살아나는 느낌입니다.
PR 에이전시를 하는 앨리 모란(Ali Moran)은 이렇게 말합니다. “글로벌 위기와 개인의 기분이 충돌하면 감정적 채찍질 같은 효과가 생겨요.” 모란은 이어 “침묵 자체가 하나의 입장 표명이 됐지만, (글로벌 이슈와) 관련 없는 게시물도 마찬가지예요. 정치적으로 옳은 수가 없는 느낌”이라고 덧붙였습다.
결국 사람들은 완전히 물러나, 개인적 생각이나 이미지는 비공개 단체 채팅이나 문자 스레드에만 겨우 공유합니다. 그 결과, 인터넷은 개인들의 평범한 일상이라는 소중한 재료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습니다.
‘구글 제로(Google Zero)’라는 표현은 검색 엔진이 인공지능으로 자체 답변을 생성해 다른 웹사이트로 트래픽을 보내지 않는 가상의 미래 인터넷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포스팅 제로(Posting Zero)’라는 비슷한 지점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분업화·상품화·세련화되지 않은 평범한 대중이 소음을 견디다 못해, 마찰과 노출에 지쳐, 소셜미디어에 공유를 멈추는 순간입니다. 포스팅 제로는 한때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누구든 무엇이든 실시간으로 기록하는’ 소셜미디어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용자가 있었기에 소셜미디어는 볼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여름이 끝나버린 해변의 쓰레기 더미처럼, 말라 비틀어진 기업들의 마케팅 콘텐츠, AI가 생성한 잡동사니, 마지막 한 줌 남은 사람들에게서 돈을 뽑아내려는 극단적 인플루언서들의 찌꺼기들만 남을 것입니다.
뭐 당분간은, 포스팅 그 자체를 사랑해 계속 포스팅하는 이들도 있겠죠. 출판사 더블데이(Doubleday) 마케터 마이클 골드스미스(Michael Goldsmith)도 그중 한 명입니다. 팔로어 1,500명 조금 넘는 트위터(현 X)에서 그의 꾸준한 캐주얼 포스팅을 예전부터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어요.
최근 골드스미스의 대표적 농담 한 가지: “개가 담배를 피운다면 두 발로 잡을까, 아니면 한 발에서 두 발톱 사이에 끼울까.” 좋아요는 하나도 안 달렸습니다. 저는 그에게 왜 계속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포스팅이라는 행동은 제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다른 컨테이너로 옮기는 카타르시스 역할을 합니다”고 답하며 덧붙였습니다. “서른 번 올려서 좋아요를 2개나 0개를 받아도 상관없어요. 제 머릿 속엔 언제나 다음 포스트가 있으니까요”
- 원문: 뉴요커 https://www.newyorker.com/culture/infinite-scroll/are-you-experiencing-posting-ennui
- 기획&편집: 뤽 (w/ 초벌 o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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