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소설은 왜 쓰는가

작가들의 글쓰기에 대한 컬럼 ‘By Heart’를 애틀란틱에 기고 하는 조 패슬러가 쓴 글. 소설을 쓰는 행위를 개인의 수행으로, 사회에 대한 참여로, 물질사회 속에서 균형을 잡는 노력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성수동의 창작자 커뮤니티 ‘안전가옥’에서 번역했다.

// 단절의 의식

늦은 밤 잠들기 전, 아들이 자고 있는 방으로 슬그머니 들어가 와이파이 공유기를 끈다. 플러그가 뽑히는 소리와 함께, 초록색으로 빛나던 공유기의 램프가 꺼진다.

이럴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뉴스를 확인하고픈 유혹을 이기기 어렵다. 물론 뉴스를 보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 어쩌면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아는 나는 아침시간을 최대한 써서 글을 쓰고 싶어한다. 와이파이는 여기에 방해가 될 뿐이다.

트위터에서 주요뉴스를 훑어보는데 딱 15분만 쓴다고 쳐도(15분으로 그칠 수 있다면), 넘쳐나는 정보를 소비하다보면 흥분이나 공황 혹은 탈진 비슷한 느낌을 갖게된다. 그래서 외부의 목소리로 내 마음을 채우는 대신 한 발 물러서는 것이다. 글쓰기 작업은 외부와 차단되어 홀로 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이 단절의 의식을 수행한다.

외부자극과의 긴장이 어제오늘 문제는 아니다. 일상이 디지털이 되기 전, 컴퓨터가 발명되기 한참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글을 쓰는 일은 고립을 요구한다. 여러 가능성과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을 밀어내는, 거부 혹은 포기 혹은 도피의 의사결정이기도, 텅 빈 페이지 속에서 고요함을 좇으리라는 의사결정이기도 하다.

시, 에세이, 소설을 만들어내는, 내면 깊은 곳의 이것은 오직 고요한 고독 속에 존재한다.

이것, 이것이 문제다.


// 내면 깊은 곳의 ‘이것’

트위터에서, 그리고 몇 차례의 모임에서 어떤 ‘문학적 충동’이라는 것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했다. 꼭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를 느낀 적은 있을 것이다. 특히 (여러 정치적 이슈가 많았던) 지난 해에는, 오늘을 살아가는 시민으로서의 존재를 목소리 높여 말할 필요성이 컸다. 스스로를 끊임 없이 되돌아보며, 이슈에 목소리를 더하는 것이 필요했다. 외면하거나 건성으로 넘겨버리는 것은 일견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다.

문학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굳건하다. 특히 위기일 수록, 한 권의 책은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인도하는 놀라운 힘을 보인다. 하지만 그런 책을 만드는 과정을 힘들어하는 작가들이 점점 많아지는 듯하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데 들인 시간이나 노력만큼, 아직 어떤 무언가로 완성되지 않은 이 미숙한 존재에 가치가 있으리라곤 누구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 개인으로서의 삶과 글을 쓰는 작업 사이의 이 팽팽한 긴장은, 여러 작가들과 인터뷰했던 지난 5년 동안 내가 함께 느낀 불안 혹은 매혹의 이유였다. 나는 (최근 <Light the Dark>라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한) 애틀란틱에 기고 중인 ‘By Heart’ 컬럼을 통해, 작가들이 글을 쓰고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그 작업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동시에 작가들과 작품 이면의 깊은 내면으로 함께 들어가기도 했다. ‘왜 글을 쓰는가?’. 알고 싶었다. 글을 쓰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그 고독은, 무엇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백 오십회 넘게 작가 인터뷰를 진행하며, 그 질문의 답에 조금은 가까워졌지 않았나 생각한다.


// 거부할 수 없는 충동

그 시작은 이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다. 글을 쓰는 것은 명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어떤 충동에서부터 시작한다. <연을 쫓는 아이>의 할레드 호세이니는 이를 ‘강박’이라 불렀다. 마크 헤이든 역시, 그 충동을 ‘스스로 인간임을 자각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할 수 밖에 없는, 어떤 경계를 넘나드는 병적인 강박’이라 불렀다.

인터뷰했던 작가들은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듯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세상을 냉철하게 분석해서 어떤 쓸모를 찾는 그런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굶주림이나 정욕에 가까운 어떤 본능적 충동이라고 봐야한다. 우리가 하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어떤 계약 같은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은 대체적으로 고통스럽다. 하지만 글을 쓰지 않는 것의 비참함보다는 낫다. 캐스린 해리슨은 말한다.

“저는 글쓰기를 사랑합니다. 쓰지 않는 다면 비참하죠. 시간이 지날 수록, 저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비참해지구요”


// 글쓰기는 도피?

하지만 어떤 원시적인 충동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이 모든 행동을 글쓰기로 인해 생기는 모종의 죄의식을 정당화 시키지는 못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는 일이라서, 어떤 퇴행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글을 쓰며 친구들에게, 가족에게, 세상에 관심을 주지 않는다. 폰은 꺼져있고, 연락은 되지 않는다. 글을 쓰는 창조적인 행위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일종의 특권처럼 될 수도 있다는, 이 불편한 진실을 거부할 수는 없다.

<마션>의 작가 앤디 위어는 최근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글쓰기를 어떤 즐거운 도피라 말했다. 도피로서의 글쓰기를 극한으로 밀어붙인 그는, 정치적인 혹은 윤리적인 담론으로부터 글을 떼어놓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떤 외부 이슈와도 분리해서, 완전히 독립된 세계에서 작품은 만들어지고 읽혀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너무 음울하거나 심각한, 혹은 정치적 메시지가 있는 소설은 피하려 합니다. 제게 있어 소설이란 어떤 탈출구와 같아요. 현실 속에서 스트레스 받기보다는, 현실을 한 번 떠나보고 싶어요”

위어의 말이 그것대로 의미가 있고 작가가 세상에 어떤 책임도 빚진 것은 아니지만, 작가는 다른 이들이 즐기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도피성이라는 이름 뒤로 숨기란 어려운 일이다. 위어의 작품을 읽을 땐, 배타적인 백인 문인의 작품임을 볼 수 밖에 없다. 위어는 이 위험한 편향을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숭배한다는 것은, 현실의 우리가 가진 흠결을 직시하기를 거부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 세상의 확장

그와 달리, 내가 인터뷰했던 작가 대부분은 세상을 탈출하기보다는 오히려 언어의 확장을 통해 세상을 확장하고 싶어했다. <조이 럭 클럽>의 에이미 탄이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우리의 감정은 이것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결코 온전히 표현하지도 공유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감각이죠.”

“여섯 살인가 되었을 때, 제 감정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유의어사전을 뒤졌는데, 찾을 수 없었죠. 어떤 슬픔 비슷한 감정이었습니다만,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두를 정확히 담아낼 수 있는 단어는 없었습니다. 단어는 늘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도 제 자신을 제대로 표현해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생각이나 감정, 아니면 제가 본 것을 정확히 표현해서 전달하기란 어렵습니다. 이런 외로움이야말로 글쓰기의 동력이 되죠.”

달리 말하면, 우리 모두가 겪는 이런 경험을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실존적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이다. 글을 쓰는 이도 읽는 이도, 진정으로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안다. 글이 우리 사이의 이 굳어버린 간격을 얼마나 좁혀주는지.

사실 그 이상이다. 침묵을 이야기하고, 이름이 없는 것에 이름을 짓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며,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의, 행동할 수 있는 것의, 성취할 수 있는 것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기 때문에.


// 혼돈과 신비를 향한 초월

글을 쓰는 것은 내면을 변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많은 작가들은 글쓰기가 ‘일상의 자의식과 깊은 황혼의 무의식 사이의 균형잡기’라고 말한다.

(기억나는 몇만 꼽아도) 안드레 더뷰스 3세, 리처드 부스, 셀레스트 응, 한나 틴티, 벤 마커스, 에일린 마일스와 같은 이들이 그들의 글쓰기를 꿈에 빗댄 언어로 말했다.

글을 쓰는 것은 마치 꿈 속에서처럼 온전히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초월 상태를 경험하게 한다. 꿈이 그러하듯, 글쓰기는 우리가 확실하다 생각하는 관념에 균열을 내어 새로운 무언가를 열어가는 과정이다. 그 균열을 통해 유연하고 깊은 생각과 새로운 정체성들이 흐른다.

제이디 스미스의 영향을 받은 건지 록산 게이는 글쓰기를 어떤 환각처럼 묘사하기도 한다. 우리가 우리 안에 수 많은 목소리를 갖고 있음을 인지하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다양하고 모순적인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소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는 ‘모호성의 땅’에 우리를 잠깐 데려다줍니다.”

지난 해 맨부커상을 받은 조지 선더스는 말한다.

“우리의 본성상 그 땅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만, 그 땅에서 우리는 순간적으로 완전한 혼란에 빠집니다. 10분 뒤면 구명조끼를 입듯 혼란에서 빠져나와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되죠.

이 모호성의 땅에 잠깐씩 노출되는 것은 정말, 정말 좋습니다. 단 몇 초만이라도 무언가에 대해 진심으로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끝내주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관념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니 말이죠.”

근본주의, 복음주의, 도덕적 절대주의는 인류를 늘상 괴롭혀왔다. 하지만 글쓰기는 그런 것들도 사실은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글쓰는 것은 우리가 ‘아름다움’이라 불렀던 어떤 혼돈과 신비에 대한 낭만을 되살려준다. 우리는 관습과 도그마에 쉽게 빠진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우리를, 다시 ‘놀라움’으로 이끈다.


// 욕망에 대한 거부

인류의 문명이 지구 환경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현재의 지질시대는 ‘인류세(Anthropocene)’라 불린다. 우리의 과소비, 집단적 욕망은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에 말 그대로 넘쳐나고 있다. 점점 더.

하지만 여기서 문학은 예외다. 글을 쓰는 행위도, 읽는 행위도 모두 거의 아무 것도 소비하지 않는다. 이 과생산 과소비의 시스템과 배치되는 경험인 것이다.

빈 종이에 손으로 글을 쓰는 행위가 (많은 작가들이 여전히 종이에 손글씨로 글을 쓴다) 물건을 사거나 광고를 보거나 소셜미디어를 쓰는 것처럼 특정 기업을 배불리지는 않는다. 연료를 때지도 않는다. 내면을 지향하는, 본질적으로 무해한 이 능력은 이 ‘인류세’에서는 예외적으로 드물고, 그래서 급진적이다.

글쓰는 일이 힘든 까닭 중 일부가 여기 있다. 의식주, 섹스, 안전, 권력이나 지위 뿐 아니라 정보, 신선함, 연결 등의 욕망을 위해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의 자본이 매일 소비된다. 언제든, 어느 방향에서든 욕망은 우리를 이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제1세계의 우리들이 매일 아침 처음 하는 행동은, 폰을 보는 것이다. 19세기 친밀함에 대한 욕망으로 처음 만들어진 이 폰은, 이제 우리가 매 순간 지니고 다니며 우리가 원하는 것을 보여줄 때까지 문질러대는, 반짝이는 욕망의 대문이다. 글쓰기는 이 욕망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그리고 다른 방법 없이, 홀로 해야 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하나에 집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 영혼의 부트캠프

<신곡>에서 단테에게 행복의 비밀을 질문받는 천사가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열망할 뿐이다’고 한 것을 생각한다. 글을 쓰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을 열망하겠다는 의지다. 한 시간 정도의 빈 시간, 펜과 종이, 그리고 내면 깊은 곳의 목소리. 다른 것은 필요치 않다. 스티븐 킹이 말했다 — ‘글을 쓸 때에는 화장실을 가는 것 빼곤 아무 것도 하지 말라’.

멜리사 프보스는 글을 쓰기 위해 연습했던 의지력과 집중력을 그가 하는 모든 일에 동일하게 적용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욕심이나 걱정으로 에너지를 산만하게 쓰기보다는 ‘에너지를 남겨두고, 우리가 진심으로 믿는 것을 위해 쓰라’고 말한다.

“우리의 작품, 행동, 가족, 사랑하는 사람에게 힘껏 쓰세요. 우리는 그런 에너지가 가득한 세상을 꿈꾸어야 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요”

글을 쓰는 이유는 여럿 있을 수 있지만, 글을 쓰는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이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손에 쥔 이 작업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이다. 다른 곳에 신경쓰지 않고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면, 그 상태는 영혼을 단련시키는 어떤 부트캠프가 되어줄 것이다.

그날의 작업을 마치고 책상 앞을 떠날 때, 스스로를 가득 채우던 그 충만함을 기억하자.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던 것을 기억하자. 할 수 있다. 오롯이 혼자서도. 다른 어떤 것도 관계없이.


조 패슬러는 뉴욕에 거주하는 작가이자 에디터, 음악가다. 2013년부터 애틀란틱에 ‘By Heart’ 시리즈를 기고하고 있다.

원문: https://www.theparisreview.org/blog/2017/12/12/write-fiction-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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