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독서와 ‘실내 생활’

// 독서는 원래 어떤 사회활동이었다.

사람들은 독서를 내향적인 취미로 생각한다. 고요하고, 머릿 속으로만 목소리를 내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조용한 활동. 하지만 근 오천년 동안, 우리가 딱히 사회적이라 생각하지 않는 쓰고 읽고 생각하는 이 일련의 행위들은, 어떤 새로운 형태의 레저활동이었다.

여러 세기 동안, 글을 아는 유럽인들은 글을 크게 소리내어 읽었다. 고대 그리스인 역시 낭독했다. 유럽의 암흑기 수도승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7세기 들어 유럽의 독서 사회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활자와 같은 기술이 등장하고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로 글을 쓰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오늘날 우리가 사랑하는 그 모습이 등장했다. 단어들을 크게 소리내는 읽지 않으며, 머릿 속에 사상을 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유럽 사회가 크게 소리내어 읽는 것에서 조용히 글을 읽는 것으로 바뀐다는 것은 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어떤 이들은 고대의 지식인들도 적어도 소리내어 읽는 만큼은 조용히 읽었다 주장했다. 하지만 당대 문학 작품 중 한 장면은 매우 중요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독서 행위를 묘사하는 장면이다.


// 혼자 조용히 읽다니!

암브로시우스는 글을 읽으며 눈을 페이지에 내리깔고, 마음으로 그 의미를 찾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와 그의 혀는 고요했다. 지금의 우리들은 책을 읽는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이 이상하지 않지만,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시대에는 미리 기척을 해야 했다. 책의 화자는 주교가 책을 읽는 그 고요한 그 장면을 바라보게 된다.

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 장면은 너무 충격적이었으리라 주장한다. 5세기에 소리를 내지 않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전혀 일상적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른 연구자들은 이 구절이 암브로시우스의 무례함을 지적한다고 말한다. 프린스턴대학에서 중세 영문학을 연구하는 반스 스미스가 말한다.

“암브로시우스가 그런 상황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요즘의 우리가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려는데 핸드폰 문자를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교는 글을 소리내어 읽어 그가 무엇을 읽고 있는지 공유하지 않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무례함에 놀랍니다”

스미스는 말했다.

“고대사회의 상식이란, 만약 당신이 사람들 곁에서 글을 읽고 있다면 그걸 소리내어 읽어 주변과 공유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우리들은 조용히 읽고 혼자 글을 소화하는 것이 기본이지만요.”

소리내지 않는 독서가 고대에는 흔치 않거나 무례한 일이었다면, 어느 시점부터 사회에서 글을 읽는 이들에 대한 기대가 달라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역사학자 로버트 단튼은 18세기 후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근대 초 유럽인들도 독서란 사회적인 활동이었습니다. 공방에서, 헛간에서 혹은 선술집에서 독서는 일어났죠. 항상 소리내어 말해지기는 했던 독서는, 꼭 지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 혼자 침대에서 조용히

하지만 마르셀 프루스트가 침대에 홀로 앉아 글을 읽고 생각할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쓰던 19세기 후반은 달랐다. 홀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과 뒹굴거릴 침실을 갖출 정도로 부와 교육수준을 가진 이들에게는 점점 보통의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는 문자의 보급이 늘고 출판물이 다양해지며 가능해졌다. 로버트 단튼은 1750년대만 하더라도 글을 아는 사람이 읽을 것이라곤 아마 성경, 연감 그리고 일부 기도문 정도라, 그걸 읽고 또 읽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1800년대들어, 사람들이 읽을 만한 신문과 정기간행물들이 많아졌고, 1800년대 후반에는 아동문학과 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떤 연구자들은 독서가 더 이상 사회적인 활동이 아니게 되면서 우리의 ‘실내 생활’이라 부르는 것들을 만드는데 일조했다고 말한다. 알베르토 만구엘이 그의 1996년 저작 <독서의 역사>에서 말한다.

조용히 글을 읽게 되면서, 독자는 드디어 책과 단어들과 제한 없는 교감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낭독하느라 단어를 하나하나 발음하지 않아도 되었다. 공공의 영역을 벗어난 글은 독립된 공간 속에 존재하게 되었다. 완독하는 것도 조금만 읽는 것도, 완전히 해석하는 것도 반만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했다.

글을 읽는 이가 그냥 여가로 읽거나 글에서 어떤 개념을 뽑아내거나, 그들의 기억과 글을 대조해보는 것도 동시에 여러 책을 펴놓고 정독하는 것도 가능했다. 표지가 생겼고 외부로부터 단절된 글은 독자 개인의 소유물이자 친밀한 지식이 되었다. 책을 조각공원에서 읽든, 시장에서 읽든, 집에서 읽든.

폴 생거가 1997년 <단어 사이의 공간>에서 쓴 내용이다.

“조용히 글을 읽으면 마음껏 호기심을 펼칠 수 있습니다. (낭독과 달리) 심리적으로 독자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어주는 셈이죠. 소리내어 책을 읽고 이야기하던 9세기만 하더라도, (글을 읽으며 만나는) 다소 불온한 지적 추측은 그 즉시 집단 속에서 수정되고 매 순간 통제되기 마련이었습니다. 논술, 출판, 혹은 지도자의 연설이라도 말이죠.”

생거가 말하듯, 이 소리를 내지 않는 ‘반사회적인’ 독서는 깊은 지적 탐구, 자아 비판, 정부나 종교의 비평은 물론 입에 담기 어려운 수준의 풍자나 비난도 가능하게 했다.

책을 읽는 이 낯선 트렌드는 자연히 그 반대를 맞닥뜨렸다. 만구엘의 저작에 따르면, 당시 회의론자들은 조용히 책을 읽는 것이 몽상가들과 게으름뱅이를 양산한다고 믿었다. (회의론자들에게) 더 나쁜 것은, 독서가 사람들이 어떤 종교적인 지침이나 단죄 없이도 학습하고 반성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19세기 말에는 조용한 독서가 너무 인기가 있어서, 특히 홀로 침대에서 책을 읽는 여성들은 성적이고 위험한 생각을 하는 것으로 걱정되기도 했다.


// 어떻게 가능했을까

왜 사람들이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글을 읽기 시작했는지, 역사학자들 사이 명확한 합의점은 없다. 폴 생거는 글 표기방식의 변화가 이 트렌드를 이끌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라틴어 표기는 원래 띄어쓰기가 없었어서, 단어단위로뜯어서내용을파악하기가쉽지않았다.

생거는 7세기 라틴어를 번역하는 아일랜드 수도사들이 띄어쓰기를 도입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요한 디자인의 변화들이 쌓여서, (외부의 도움 없이) 홀로 조용히 책을 읽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파크스 역시 그의 저작 <Pause and Effect>에서 비슷한 내용을 주장했다. 구두점이나 띄어쓰기와 같이 표기법의 시각적인 변화가 우리의 읽는 방식을 규정한다고 한다. 이 초창기의 출판은 필사가 전제였다. 책을 만드는(글을 쓰는) 이들은 그들의 독자가 누가 될지 모르고, 라틴어에 얼마나 능숙할지 모른다. 그래서 읽는 방법의 어떤 표준을 제시해야만 했다- 여기서 잠깐 멈춘다, 이 두 단어는 서로 별개이다, 이것은 장음으로 발음한다 등.

이런 이론은 라틴어에 기반한 유럽 대부분의 쓰기와 읽기에 적용된다. 띄어쓰기가 없고, 성조와 운율이 중요한 한자를 쓰는 다른 문화권은 이 소리내지 않는 읽기가 발전한 양상이 라틴어와는 다를 것이다.

주류 역사에서는 중세까지 성행했던 낭독의 종말을 르네상스 운동의 일부라고 말할 것이다. 인본주의와 개인을 되찾았던 운동이었으니.

하지만 이런 가능성도 있다. 홀로 있는 것에 대한 인류 본연의 욕망이, 책이라고 하는 자그마한 탈출구를 만났을 뿐이었다고. 우린 그냥 그곳까지 가는 아주 작은 계기 하나가 필요했을 뿐이다.

번역: 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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