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는 타고, 지도는 사라져 / 어제의 유령을 쫓지.”
90번 국도 너머로 교통량이 줄어들었다. 지평선에는 헛간과 나무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스마트폰의 스포티파이로 재생 중이던 렌터카 스피커에서는 느긋한 사이키델릭 록(psychedelic rock)의 도입부 리프가 흘러나왔다. 가사는 포크풍의 비브라토로 내 기분에 꼭 맞게 다가왔다. “하늘엔 연기 / 평화는 없다”고 밴드의 보컬이 불렀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정말로 노래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밴드 ‘벨벳 선다운(Velvet Sundown)’도 마찬가지로 실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들의 음악·가사·앨범 아트 모두가 인공지능의 창작물일 수 있다.
밴드 사진도 그렇다. 밴드와 연관된 소셜미디어 계정들은 이 문제에 대해 퉁명스럽다. “사람들은 우리가 가짜라네. 어쩌면 당신도 아닐까?”라는 벨벳 선다운의 게시글이 하나 있다. (해당 계정은 다이렉트 메시지로 보낸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출처가 뭐든, 벨벳 선다운은 제법 성공적이다. 지난달에만 앨범 두 장을 냈고, 세 번째 앨범도 곧 나온다. 스포티파이 월간 청취자는 85만 명이 넘는데, 이는 1980년대 후반 MTV의 단골이었던 마티카(Martika)나 하드 밥 재즈 색소폰 연주자 캐넌볼 애덜리(Cannonball Adderley)의 청취자 수를 능가한다.
음악 자체? 글쎄, 나쁘지 않다.
음.. 그렇다고 좋지도 않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미학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이번 주 초 시카고에서 위스콘신 매디슨까지 운전하며 벨벳 선다운의 앨범 두 장을 모두 들은 결과, 지금 스포티파이에서 가장 성공한 AI 그룹일지 모르는 이들은 단지, 근본적으로, 그리고 불길하게도 무해(無害)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소비되고 운전·요리·청소·업무·운동 등 평범한 행위를 하며 듣는 음악의 미래를 상징한다. 생성형 AI가 인터넷을 점령하기 훨씬 전부터 스트리밍 음악은 이미 ‘무난’ 그 자체였다—능동적 청취가 아니라 분위기 조성을 위한 수단이었다.
벨벳 선다운과 함께한 단 하루의 로드 트립만으로도 이 사실은 충분히 증명됐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음악의 상당 부분은 기계가 만들었어도 상관없을 정도다.
AI 앨범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적 블록들은 오래전부터 맞춰지고 있었다. 챗GPT 같은 대형 언어 모델은 그럴듯한 노랫말·라이너 노트·기타 텍스트 자료를 만들어 낸다.

수노(Suno) 같은 소프트웨어는 텍스트 프롬프트만으로 악기와 보컬이 포함된 곡을 만들어 준다. 이미지 생성기는 앨범 아트용 일러스트를 지시대로 그리고, 밴드 및 멤버들의 사실적인 이미지를 만든 뒤 여러 이미지를 통해 그들의 비주얼을 프로듀싱한다.
매디슨에 도착한 뒤 나도 수노에 가입했다. 순식간에 사이키델릭 록 감성의 로드 트립 테마 곡을 뚝딱 만들 수 있었다. 벨벳 선다운보다는 증폭되고 시타르 느낌은 덜했다. 트랙 이름조차 내가 정할 필요가 없었다.
수노가 대신 ‘엔드리스 하이웨이(Endless Highway)’라 명명해 주었다. 그 가짜 남성 보컬은 “고무는 타고, 지도는 사라져 / 어제의 유령을 쫓는다”고 읊조렸다. 그래 그래, 알았어.
문화적 환경 또한 AI 음악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심지어 열광하게 만들었다. 세기말 즈음, 냅스터는 디지털 음악을 공짜로 만들었고, 아이팟은 이를 정당화했다. 한 손에 레코드숍 전체를 들고 다닐 수 있었다. 곧이어 최대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가 된 스포티파이는 플레이리스트를 선별해 알고리즘으로 생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청취자에게 새 음악을 추천했으며, 실존하든 창작되었든—애시드 재즈, 홀리데이 보사노바 등—어떤 하위 장르든 몇 시간씩 손쉽게 클릭해 들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느긋한 일요일(lazy Sunday)’ 같은 표현도, 잔디 깎기나 베이킹처럼 구체적인 활동도 곧 플레이리스트가 됐다.
스포티파이가 큐에 넣어 준 곡은 늘 ‘그 정도면 충분’했다. 언제든 건너뛰거나 새 프롬프트를 입력할 수 있었으니까.

실존 여부를 떠나, 벨벳 선다운은 밴드라기보다 플레이리스트에 가깝다. 스포티파이에서 ‘공식 인증 아티스트(Verified Artist)’ 설명란에는 한때 “이들의 사운드는 1970년대 사이키델릭 얼터너티브 록과 포크 록의 질감을 혼합하면서도 현대 얼터 팝과 인디 구조와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고 적혀 있었다.
반세기를 아우르는 그 고전적 조합은 곡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일관되게 스며 있다. ‘애즈 더 사일런스 폴스(As the Silence Falls)’는 인디 포크 감성으로, 흐릿한 기타와 부드러운 보컬이 특징이다.
‘스모크 앤 사일런스(Smoke and Silence)’는 보컬이 강해지고 클래식 록 느낌이 나는 블루지한 곡이다. 트랙마다 보컬 톤도 달라 보이는데—생성 과정의 특이점일까—그 결과 앨범은 의도된 LP라기보다 ‘블라인드백(Blind-Bag)’에 가까운 복불복 같다.
음악은 한때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펑크, 록, 컨트리, 얼터너티브 등. “무슨 음악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은 취향·가치·패션 감각까지 드러낼 수 있었다. 록커들은 체육관 뒤편에서 담배를 피웠을 것이고, 그들 역시 운동부나 ‘너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파벌이었다.
음악 하위문화에 몸담으려면 노력해야 했다. 맞는 공연장·음반·진(Zine)·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 시절 음악은 부족(Tribal)이었다. 시스터스 오브 머시(Sisters of Mercy)·건스 앤 로지스(Guns N’ Roses)·바우하우스(Bauhaus)와 관계를 맺는다는 건 일종의 헌신이었다.
오늘은 그렇지 않다. 인터넷은 하위문화를 분절하고 평평하게 만들었다. 벨벳 선다운의 조종자들은 사이키델릭·포크·인디라는 부드러운 짜깁기를 세련된 퓨전이라 포장하지만, 사실 그것은 단지 무심한 스타일 평균치의 얼룩일 뿐이다.
사이키델릭·포크·인디 록 각각은 음악적 관습·영성·내면성·사회·정치적 상황 등에 대해 나름의 메시지를 전한다. 벨벳 선다운은 그런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 방식은 밴드, 혹은 그 창작자에게 꽤 잘 먹히는 듯하다. 벨벳 선다운은 실제로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게 할지도 모른다. 이들의 트랙은 어느 것도 강렬하지 않다.
대신 각 곡은 약간씩 다른 요소—시타르 리프, 블루스 기타 솔로, 포크에 가까운 컨트리 트웨잉—를 제공해 어떤 청취자에게나 무난히 들릴 수 있다. 아마 인간 아티스트라면 이렇게 영혼 없는 밋밋함을 견디지 못하겠지만, AI는 부끄러움이 없다.
가사가 밍밍한 우울함을 풍기는 것도 청취자 수에 기여하는 듯하다. 각 행은 짧고 문구들은 거의 연결되지 않아, 청취자는 뭐든 원하는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 / 땅에 부딪힌 부츠 / 하늘을 오르는 연기 / 평화는 없다.”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듯하다가, 사실 전혀 그렇지 않음을 깨닫는다.
음악이 흔히 그 영향을 받은 정치적 입장을 드러낼 때도, 그 방식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스포티파이 인기곡 중 하나인 ‘엔드 더 페인(End the Pain)’의 후렴을 보라.
포크 록 특유의 긴박감으로, 자칭 “프런트맨이자 멜로트론 마법사” 게이브 패로(Gabe Farrow)는 “총도, 무덤도 이제 그만 / 영웅은 말고, 용감한 자만 보내라”고 외친다. 반전가 분위기를 풍기지만, 세부가 부족해 어느 시대·어떤 갈등의 지지자든 반대자든 무난히 받아들일 수 있다.
익명성과 무해한 감수성은 오늘날 음악—인간이든 기계가 만들든 간에—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느끼게 하기보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만드는 데 자주 쓰이기에 가치를 지닌다.
칸막이 없는 사무실에서 사람들은 약간의 사생활을 좇아 헤드폰을 썼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로 교통 소음이나 룸메이트의 줌 통화로부터 방해받지 않기 위해 쓴다. 인터넷에 연결만 하면 스피커는 곧 알고리즘 기반 화이트 노이즈 머신이 된다. 거기서이탈로 디스코(Italo disco)나 칠합(chillhop)가 흘러나오기만 하면 뭐.
이러한 환경에 가장 잘 맞는 음악은 브라이언 이노(Brian Eno)가 1979년 앨범 『Music for Airports』에서 ‘앰비언트(Ambient)’라 칭했던 계보에서 내려온다. 이 음악은 귀 기울여 듣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저 다른 모든 소리를 잠재우는 용도였다.
주간 90번 국도 옥수수밭 사이를 달리며 벨벳 선다운은 그 역할을 했다. 이들의 트랙은 어떤 만족도 주지 않았지만, 그 상황에는 딱 맞았다. 나는 길 위에 있었지만, 필라테스 수업을 기다리거나, 델리 미트값을 계산하거나, 인터넷 밈을 스크롤하는 등 어디에 있어도 그 음악은 제 할 일을 했을 것이다.

가장 나쁜 점은, 괜찮았다는 것이다. 정말 괜찮았다! 난감하게도 벨벳 선다운의 곡들은 내 머릿속에까지 파고들었다. 음악을 좋아한 건 아니지만, 내 미적 판단은 ‘바이브’—극도로 가공된 분위기라는 현대적 완곡어법—에 굴복했다.
이 감각을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을까? 휴게소에서 나와 다시 차를 탔을 때, 나는 스포티파이에게 밴드를 메타적으로 활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벨벳 선다운과 비슷한 곡으로 플레이리스트를 생성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모르는 밴드들이 주르르 나왔다.
몇몇은 뭔가 이상했다. 애팔래치안 화이트 라이트닝(Appalachian White Lightning)이나 플래허티 브러더후드(Flaherty Brotherhood)는 AI 그룹일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조금 검색해 보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의심한다.)
당연했다. 나는 알고리즘에게 정제되고 진짜 같지 않은 사이키델릭·포크·인디 록 채널을 달라 했고, 알고리즘은 그대로 했다. 맞춤 플레이리스트에 들어간 다른 아티스트들—사우스캐롤라이나(South Carolina)의 포크 록 싱어송라이터 자니 델라웨어(Johnny Delaware)? 벨기에(Belgium)의 포크 팝 4인조 레몬 스트로(Lemon Straw)?—이 진짜인지, 그것을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지 잠시 고민했다.

그 고민들에 지쳐 다시 벨벳 선다운으로 돌아왔다. 운전하며 음악을 들으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하지만 그 ‘아무것도 아님’을 점점 더 예리하게 느꼈다.
나는 감동도, 슬픔도, 사색도 없었고, 단지 내 몸과 마음이 삶·죽음·컴퓨터 사이 불안정한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만 자각했다. 이것은 ‘2차 음악 청취’다. 음악을 듣는 행위를 ‘경험’하는 것이다. 실재하지도 않는 밴드만큼 이 서비스를 잘 제공할 팀이 또 있을까?
그러나 붉어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나는 이 음악이 예술이 되길 바라지도, 창작자와 소통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미국의 텅 빈 저녁길에서 큰 차를 몰며 최대한 아무 생각, 아무 감정 없이 있고 싶었다.
이 음악—아마 이제 대부분의 음악—은 춤추기 위한 것도, 공항용도 아니다. 공허(空虛)를 위한 것이다. 나는 ‘재생’을 눌렀고, 운전대를 꽉 잡고, 톨웨이를 다시 가속해 들어갔다. 기계들은 나를 무감각 속으로 데려가주었다.
- 원문: 디애틀란틱 https://www.theatlantic.com/technology/archive/2025/07/velvet-sundown-ai-band-spotify
- 기획& 편집: 뤽 / 초벌: o3
- 같이 읽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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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저도 생각하는 주제내요.. 솔직한 글 잘읽엇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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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음악으로써 듣고자 하는 이들이 몇이나 있었겠나. 영혼을 울린다?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 조차 사치인 것이다. 그저 들려왔을 뿐인 대부분의 노래들. 물론 인생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든 건 사실이지. 하지만 거기에 몰입하진 않는다. 내 생활이 아닐뿐더러, 여유 시간의 대부분을 드라마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감상하거나… 그렇다고 AI 음악이 좋다는 것도 아니다. 그냥 관심이 없을 뿐이지. 언젠가 내 밥그릇에도 AI가 파고든다면 그제서야 심각해지겠지. 지금 이 포스팅도 o3 초안이다. 말 다했다. 뭐 그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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