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 왓챠는 왓챠에게 뭐에요?

지난주 목요일, 왓챠를 사용하던 사람들에게는 좀 업데이트가 있었습니다. 서비스의 리브랜딩이 있었던거죠.

  • 리뷰/별점 서비스 ‘왓챠(구 왓챠)’가 왓챠피디아로,
  • OTT 서비스 왓챠플레이가 ‘왓챠(신 왓챠)’로 변경되었습니다.
  • 이하 내용에서는 혼돈을 피하기 위해 ‘구 왓챠’와 ‘왓챠 플레이’로 명명해서 쓸게요.

뭐 서비스의 로고나 디자인이 바뀐 것 자체는 그닥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바뀐 직후에는 에이 뭐야 구려라고 불평하다가(정확히는 좀 불평하고 해야 좀 아는거 같으니까 동참했다가) 이내 잊고 쓰기 시작하죠.

알잖아요 우리 모두. 2014년 에어비앤비가 로고를 바꾸었을 때에도 그렇고, 2016년 인스타그램이 갬성 넘치는 카메라 로고를 버렸을 때에도, 세상 끝날 것처럼 호들갑 떨었지만 이젠 언제 그랬냐는 듯 잘만 쓰고 있다는 것을요.

중요한 것은 ‘왜’ 입니다. 왜 이렇게 바꾼걸까. 음 아니 더 중요한 건 이거에요. 왜 그동안은 이렇게 바꾸지 않은 걸까.


1. 확실히 해라, 너네 뭐하는 회사냐 – 와.. 왓챠요

왓챠가 처음에는 회사 이름이 좀 특이했는데, 혹시 기억하시나요. ‘프로그램스frograms‘라는 회사이름이었어요. 뭐 배민 만드는 회사가 우아한 형제들이고, 토스를 만드는 회사 이름도 비바 리퍼블리카고, 지그재그 만드는 회사가 크로키 닷컴이기도 하고 하니 서비스 이름과 회사 이름이 다른 것이 그닥 특이한 건 아닙니다.

근데 프로그램스는 2018년 회사 이름을 ‘왓챠’로 바꿉니다. 같은 시기 120억 규모의 시리즈C 투자를 받기도 했죠. 투자 유치 보도자료에 ‘브랜드 정체성을 공고히’ 하겠다는 선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IR 과정에서 이야기가 나왔을 겁니다. ‘너네 확실히 해라’라고 말이죠.

젊었던 지난날의 알렉스

회사가 사명을 서비스로 바꾸는 건 이곳이 우리의 베이스캠프라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쉬이 하는 결정은 아닙니다. 그 서비스는 회사의 철학을 담아야하고, 회사가 하려는 비즈니스를 가장 잘 떠받쳐야 하죠. 그리고 회사는 그 핵심 서비스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가져야하는 거구요.

당시 프로그램스가 ‘왓챠’라는 서비스 브랜드로 사명을 변경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왓챠의 서비스는 리뷰서비스 왓챠와 OTT서비스 왓챠플레이를 갖고 있었고, 블록체인 프로젝트인 콘텐츠 프로토콜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2. 왓챠의 근간은 뭐냐 – 그..그게 데..데이터, 알고리즘..

여기서부터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박태훈 이하 팀의 핵심 정체성이 ‘왓챠’에 있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 근데 왓챠의 핵심 정체성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아마 좀 복잡해질거에요. 서로 의견이 다를 거고, 그 다른 것이 그 동안 투닥투닥했을 거고, 그러니 2018년 이후 2년 반이 걸려서 서비스 브랜드가 정리된거겠죠.

자, 7년 전인 2013년 박태훈 (당시 프로그램스) 대표가 기고한 글입니다.

“제대로된 제품이 없는 상황에서 마케팅, 영업, 채용을 하기 위해 그런 행사에 가는 것은 큰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제품이 최고의 마케팅이며, 최고의 영업이고, 최고의 채용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제대로된 제품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라면, 최고의 제품을 만들고 싶어한다. 본인이 스티브 잡스가 아니라면, (그리고 아마 아닐것이다) 영업이든, 마케팅이든, 제휴든, 무엇이든 제품부터 시작해야 한다. (잘 생각해보면 심지어 잡스도 그랬다)”

출처: 벤처스퀘어 https://www.venturesquare.net/515226

그리고 2017년 한 행사에서 발표한 내용이에요.

“구글의 목표는 세계 최고의 검색 엔진이 되는 것이었죠. 우리는 개인을 가장 잘 아는, 세계 최고의 ‘개인화’ 엔진이 되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출처: 더퍼스트미디어 https://www.thefirstmedia.net/news/articleView.html?idxno=35364


(구) 왓챠를 오래 써온 올드유저들이라면, 혹은 이바닥에 관심을 오래 가져온 사람들이라면 구 프로그램스가 주로 어떤 홍보활동을 했는지 기억하실 겁니다. ‘네이버보다 별점이 많다’라는 꼭지로 몇 억개의 별점/리뷰가 있다는 것을 항상 어필해왔죠. 그리고 항상 ‘딥러닝’과 ‘개인화’라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단어를 꼬박꼬박 써왔습니다.

박태훈 대표의 초기 인터뷰를 보면, 사실상 페이지랭크로 세계를 정복했던 구글과 비슷한 결의 구상을 하는 듯 합니다. 엔지니어링 회사인거죠. 실제로 구 프로그램스는 창업 초반부터 ‘뛰어난 개발자가 많다’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R&D 부서가 있었을 정도니까요.

왓챠 공동창업자인 원지현 COO(알렉스)의 인터뷰

(최근 유퀴즈에서 알려졌듯) 대표인 박태훈 대표가 과학고- 카이스트 출신인 것도 한 몫 했을겁니다. 딥 러닝의 가능성을 일찍부터 알아봤고, 이를 영화라는 상품에 상용화 적용을 하기 시작한 셈이니까요. 그 퀄리티도 꽤 좋습니다. (구) 왓챠를 써온 이들은 다들 영화 보기 전에 ‘나의 예상 별점’ 한 번 쯤은 검색해볼 거에요. 보고 나서 ‘와 왓챠 진짜 귀신같이 맞추네’ 하고 감탄한 적도 많을테고요.

그러니 새로운 사명과 같은 이름의, 최상위 서비스의 지위는 (구) 왓챠가 가져가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겁니다. (구) 왓챠에 데이터가 쌓이고, 백에서 이 데이터를 딥 러닝해서 개인화에 필요한 알고리즘을 뽑고, 그 알고리즘에 의거해서 광고/커머스 서비스를 붙일 수 있으니까요. (구) 왓챠가 있으니 데이터 기반 개인화 OTT인 왓챠 플레이가 있고, (구) 왓챠에 북 리뷰 서비스가 들어 갔으니 이북이든 웹소설이든 웹툰이든 이런게 또 가능할거고

티팕 알렉스 눈감아..

마음 아프니까 길게 얘긴 안하겠습니다만, 블록체인이라는 개념이 한창 화제일 때 왓챠의 이 데이터와 알고리즘 로망이 극대화되었습니다. 장르를 불문 디지털 콘텐츠를 객체화하고, 각 객체에 대한 사용자의 데이터를 익명으로 수집/분석하고, 알고리즘이 인사이트를 뽑아 2차 사업으로 이어지게 한다는 로망. 여전히 개념적으로 꽤 유효한 모델이라 생각됩니다만, 문제는 당시의 코인판이 거품 낀 허위 투성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왓챠는 공식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종료한 상황입니다)


3. 근데, 어쩜 콘텐츠는 그런게 아닌가벼..

현재 박태훈 이하 팀은 100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거대한 팀의 이름은 왓챠. ‘왓챠’를 핵심적으로 하고 있죠. 근데 왓챠가 데이터와 알고리즘.. 이라고 하기엔 어째 좀 쎄-한 생각이 들기 시작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구) 왓챠에 별점/리뷰 데이터가 쌓이고, 왓챠 플레이에 또 시청 데이터가 쌓이면 그걸 기반으로 후방통합 – 사람들이 볼법한 덜 알려진 영상을 노출하고 국내 들어오지 않은 (될 법한) 독점 영상을 떼오는 걸 하려고 했을 겁니다. 2018년 이맘 때에는 그걸 위해 (구) 왓챠의 서비스 개편도 크게 했고요. 이론적으로는 모든게 말이 됩니다. 데이터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거기에 ‘데이터와 알고리즘, 추천’으로 OTT 시장을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넷플릭스가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문제는 넷플릭스 때문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넷플릭스가 분단위로 데이터를 보고, 그걸 기반으로 추천 알고리즘을 뽑고, 사람마다 개인화해서 노출하면서 귀신처럼 사업을 한다더라..는 도시전설이 있었으니까요.

조금 핀트가 안맞습니다. 이게 인과 혹은 선후가 뒤바뀐 것 같은거죠.

자,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1) 왓챠(들)를 뒤적거리다가 오 이거 별점이 이리 높은데 내가 왜 몰랐지? 하면서 보기로 하는 빈도와, 2) 뭔가를 보고 나서 혹은 보기로 결정하고나서 별점을 확인하고 오잉 이거 예별이 넘 높네/낮네 라고 확인하는 빈도. 둘 중 무엇이 많을까요.

다시 말해, 별점 혹은 추천은 우리가 영화/드라마를 선택하게 하는 변인일까요, 아님 뭔가의 이유로 선택한 바를 강화시켜주는 주변값일까요.

추천 많다고 볼 거 잘 고르는 거 아닌거 우리 다 알잖아요

넷플릭스도 그렇습니다. 넷플릭스는 아주 거대한 자본을 일으켜 업계를 통으로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사이드 무기로 쓰지만, 이는 (콘텐츠를 소싱하는) 자본에 복무합니다. 그 자본은 테드 사란도스 이하 프로듀서 팀에 복무하고요. 넷플릭스의 기술력은 전 세계를 하나의 채널로 묶어 고화질 영상을 끊김없이 쏘는 데에는 아주 중요한 요소지만, 콘텐츠를 모으고 사람들에게 보게하는 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왓챠도 몇 차례 경험했을 겁니다. 소소한 콘텐츠 여럿보다 빅 네임 콘텐츠 – <킬링이브>, <체르노빌>-가 먹히고, 특히 국내의 빅 네임 – <부부의 세계>-이 아주 잘 먹히는 것을 보면서요. 어라 이거 되네, 되어버리네?

넷플릭스는 한국 드라마가 아시아 전역을 휩쓰는 경험을 하기 시작하자 아예 스튜디오에 돈을 부어서 밭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왓챠도 속이 탈겁니다. 아 이거 데이터 싸움이 아니라 쩐 싸움이구나. 지금 그렇다면 우리의 핵심 정체성은 데이터 이런걸로 하면 안되겠구나.. 그럼


4. 콘텐츠 회사 왓챠의, 콘텐츠 서비스 왓챠

먼 길 돌아왔습니다. 왓챠는 이제 콘텐츠 서비스 회사로 스스로를 규정했습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습니다. 일단 왓챠플레이라는 확실한 현금흐름이 있고, 넷플릭스를 필두로한 OTT 시장이 본격화되는 시기이기도 하니까요.

시리즈D 투자가 마무리 되었다는 소식도 있던데, 아마 이 IR 과정에서 이 논의를 투자자들과도 했을겁니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한 모델은, 터지면 세계를 옴팡 먹어버릴 수도 있을 수도 있을테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알기 어려우니까요.

10년의 중량감

본인이 진퉁 이과인..인 박태훈 대표 개인으로서도 고민이 많았을겁니다. 단순히 ‘돈 되는 거에 집중하자’ 이상의 고민을 경영진과는 했을거에요. ‘데이터/알고리즘 회사의 대표’로는 너무 훌륭한 프로필인데 반해, 자본과 미디어 플레이를 하는 콘텐츠 회사 대표로서의 정체성 피벗은 아마 꽤 스트레스가 될테니까요. 물론 근 10년 콘텐츠 바닥에서 구른 짬이 있으니, 아주 빠르게 적응해나가겠지만요.

콘텐츠 회사 왓챠는 당장 올 하반기부터 베팅을 하기 시작할 겁니다. 추천엔진이 아닌 OTT로서 경쟁을 하려면 독점 콘텐츠 확보가 필연적이고, 오리지널을 직접 제작하는 것도 고려해야겠죠.

무엇을 만들지 판단할 때, 정확히는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 판단할 때, 데이터는 참조 대상이 될 수는 있겠지만 가부를 결정한 요소는 못될 겁니다. 최근 왓챠는 오리지널을 제작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아마 내년 정도면 콘텐츠도 발표하고, 브랜드 캠페인도 세게 하겠죠.


지난주 보도자료에 인용된 박태훈 대표의 한 마디.

모두의 다름이 인정받고 개인 취향이 존중받는 다양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사업을 확대했다

누가봐도 딥러닝 하는 엔지니어링 회사라기보다는 디즈니 같은 콘텐츠 회사의 슬로건이네요.

  • 글/편집: 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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