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맥주, 그리고 코딩: 페이스북의 광기어린 그 시절 (번역)

*번역자 주: 2018년 7월 와이어드에 기고된, 아담 피셔가 회고 형식으로 재구성한 인터뷰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담 피셔의 <천재의 밸리 Valley of Genius>에서 발췌했다. 

꼬꼬마였던 마크 주커버그가 팔로알토로 이사간 것은 2004년이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이 회사에 영향을 미치는 페이스북의 문화를 그 때 만들었다. 

영화 <소셜 네트워크>를 본 모든 이들은 페이스북의 설립 뒷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시작은 2004년 봄 학기, 하버드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종종 간과하는 것은 페이스북 초기 몇 달 동안은 그 베이스가 케임브리지였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도메인도 thefacebook.com 이었고, 실리콘밸리의 핫한 소셜네트워크 ‘프렌즈스터’의 카피캣일 뿐이었다. 

어쨌든 마크 주커버그가 만든 그 사이트는 대학가에서 화제였다. 그래서 그는 친구 몇몇과 기말고사 이후 실리콘 밸리로 이사가서 여름 동안 페이스북을 전국구 서비스로 만들기로 한다. 실리콘 밸리는 인터넷이 발달한 곳이라고, 적어도 당시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당시 실리콘 밸리는 인터넷의 황금기가 끝나가고 있다는 통념이 있었다. 이미 경쟁구도는 대략 정리된 상태였고, 웹 점유율은 크게 변화하지 않는 때였다. 인터넷 붐은 진작에 끝나 3년도 더 되었다. 아무도 마크 주커버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실제로 당시 주커버그는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지하실에서 컴퓨터를 만지며 망상에 차있는 야망찬, (만 나이) 십대의 꼬마였다. 컴퓨터는 잘 다루었지만 그것 말고는 ‘노답’인 사람이었다. 주커버그가 하버드에 있을 때, 냅스터 같은 사이트는 개인 것이 아니라 기업이 만들고 운영하는 사업체라고 설명해줘야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주커버그는 천재적인 개발자이기는 했다. 운명적이었던 그 여름, 그는 실리콘 밸리의 몇몇 핵심 인물들을 만났고, 이름 말고는 아무 것도 없던 회사를 근본적으로 다시 설계하게 된다. 전설처럼 입으로만 전해지던 2004년과 2005년 사이의 역사적인 몇 개월, 이를 취재하기 위해 나는 핵심 인물이라 할 만한 인물들 전부와 인터뷰했고, 당시 투자를 고려했던 몇몇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의 페이스북에까지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치고 있는, 어떤 스타트업의 초창기 모습을 이제 아래에서 보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조크였고, 회사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모든 것은 그저 여름에 맥주를 원샷(비어퐁)하고 코드를 짜기 위해 미칠 듯이 달리기 위한 구실일 뿐이었다. 주커버그의 첫 명함에 쓰인 직함이 (그 유명한) “I’m CEO …bitch.” 였으니까.


닷컴 to 소셜

숀 파커 (냅스터의 공동창업자이자, 페이스북의 초대 사장): 닷컴 시대는 냅스터와 함께 끝이 났습니다. 닷컴 버블이 터지면서 소셜 미디어 시대가 시작됐죠.

스티븐 존슨 (저자, 문화평론가): 당시 웹은 근본적으로 ‘페이지’라고 은유되곤 했습니다. 하이퍼텍스트는 페이지 간의 연결이었죠. 그 때에는 사용자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웹의 일부라고 생각되지 않았죠.

마크 핀커스 (소셜미디어 특허의 공동소유자, 징가 창업자): 냅스터가 최초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페이지가 아닌, 사용자 중심의 웹에서 말이죠.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인터넷이 완전히 분산된, 개인간(P2P) 네트워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대 미디어 중심의 네트워크를 탈피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연결되는(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말이죠.

스티븐 존슨: 제겐 2000년대 초반 블로그가 시작이었습니다. 어떤 개인의 관점을 담은 사이트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니까요. 그리고 갑자기 어떤 상상이 시작되었죠. 오, 웹을 통해 이들을 잘 엮어서 보여줄 수 있는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마치 제가 이 다섯 명의 블로거를 신뢰하는 것처럼, 그들이 신뢰하는 것을 제게 추천해줄 수 있다면? 그것이 블로고스피어의 초기 모습이었죠.

에브 윌리엄스 (트위터, 미디엄 공동창업자): 그 때의 블로그는 보통 링크 더미였습니다. 인터넷과 테크 관련한 내용들이 대부분이었죠. 생각해보세요. 인터넷에서 인터넷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더 많은 인터넷을 찾는 다는 것. 재미있지 않나요?

스티븐 존슨: 그 과정을 통해 기본적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추천되는 다양한 사람들의 링크를 모아서 보게 되죠. 각자의 필터가 생기는 셈이에요. 

마크 핀커스: 2002년 리드 호프먼(링크드인 창업자)과 브레인스토밍을 한 번 해본 적이 있어요. 만약 웹이 칵테일 파티처럼 될 수 있다면? 이 칵테일 파티에서 서로 공통분모를 찾아 이를 연결고리 삼고 계속 뻗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떤 것이 (‘웹’ 칵테일파티에서) 좋은 연결고리였을까요? (칵테일 파티에서) 좋은 화제/연결고리는 직업, 인터뷰, 데이트, 아파트, 집, 소파죠. 

그래서 리드와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웹에서 사람들의 연결고리는 구글보다 더 가치있는 무언가를 만들지도 몰라. 왜냐하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친밀감을 갖고, 이유를 좇아 모이니까. 거기서 신뢰가 생길 수 있지’ 의미 있는 신호 대비 노이즈 비율은 (오프라인 대비) 높을 수도 있죠. 그것을 우리가 웹2.0이라고 부르건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당시는 인터넷 시장의 혹한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죠. (주: 닷컴 버블이 빠질 무렵)

숀 파커: 2000년부터 2004년 페이스북이 등장하기 전까지, 인터넷으로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은 대충 다 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바닥을 찍었던 것은 2002년 부근일 거에요. 페이팔이 그 때 상장했는데, 그게 그 해의 유일한 테크 관련 IPO였을 거에요. 그 땐 뭐 다 해서 여섯 개의 회사만 펀딩을 받거나 하면서 그 시기를 버텨냈습니다. (온라인 주소록 서비스인) 플락소(Plaxo)도 그 중 하나였죠. 플락소는 소셜 네트워크의 이전 세대의 아이디어에 해당합니다. 마치 다리 달린 물고기처럼, 좀 이상한 애였죠.

애론 시틱(페이스북 “좋아요”를 개발한 그래픽 디자이너): 플락소는 세대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였습니다. 플락소는 계획적으로 설계된 바이럴 엔진의 최초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후 우리는 바이럴과 그로스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했죠. 

숀 파커: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일이, 플락소에서 바이럴 기반 그로스를 최적화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애론 시틱: 바이럴은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제품을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죠. 바로 그거에요. 사람들이 의도를 가지고 홍보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사람들이 소프트웨어, 제품을 쓰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는 과정 중에, 다른 이들에게 퍼뜨리는 것이죠. 

숀 파커: 아마 냅스터가 아닐까 하는 1세대 소셜 네트워크의 모습에서부터 소셜 네트워크는 아니지만 그 유사한 요소를 갖고 있었던 플락소, 그리고 링크드인, 마이스페이스, 프렌즈스터를 지나, 페이스북은 이 일련의 진화를 통해 오늘날 소셜 네트워크를 정의할 수 있었죠. 

애즈라 캘러한 (페이스북 초기 멤버): 2000년대 초반 거의 모든 얼리어댑터들은 프렌즈스터에 가입했었고 그들은 정말 촘촘한 네트워크를 구성했어요. 활동도 많았죠. 하지만 머지않아 한계에 마주하고 말았습니다. 

애론 시틱: 정말 큰 레이스가 벌어지고 있었고, 프렌즈스터는 진짜로 “소셜 네트워킹”이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해낸 것 같았어요. 그 땐 그들이 승자였어요. 그런데 뭐라고 딱 확실히 말할 순 없었지만, 사이트가 점점 느려졌고 언젠가부터는 종종 멈추고 그랬어요.

애즈라 캘러한: 그리고 마이스페이스.

에브 윌리암스: 마이스페이스에게는 일대의 기회였죠. 

숀 파커: 정말 격변의 시대였죠. 순식간에 마이스페이스는 프렌즈스터로부터 세상을 뺏어왔고, 굳히기 시작했어요. 프렌즈스터의 쇠퇴는 가속화되었고, 마이스페이스가 떠올랐죠. 

스캇 말렛(사진 태그 기능을 개발한 페이스북 개발자): 마이스페이스 인기는 대단했지만, 그들도 역시 스케일에서 문제가 있었죠. 

애론 시틱: 그 때 조용히, 2004년 2월, 페이스북이 등장했죠. 

더스틴 모스코비츠(주커버그의 한 때 짝꿍):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아니지만, 그 당시엔 흔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사진을 보는 것이 너무 어려웠던 것이죠. 하버드의 모든 기숙사는 ‘페이스 북’이라는 책자를 갖고 있었어요. 어떤 곳은 종이책으로, 어떤 곳은 온라인으로 어떤 곳은 아예 없었죠. 우린 이를 표준화해서 온라인에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들과 이름도 구분해야 하니까(!), 띄어쓰기 없이 ‘페이스북’이라고 불렀죠. 

마크 주커버그(페이스북 창립자, CEO): 몇 주 되지 않아 수 천 만명이 가입했습니다. 다른 학교에서도 가입요청 이메일을 보내오기 시작했죠. 

애즈라 캘러한: 페이스북은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시작했는데, 그게 아이비리그 학생들의 오만하고 콧대 높은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이비리그에 있는 애들이 그냥 친구를 만들고 싶어했던 그런 것이었으니까요. 

애론 시틱: 페이스북이 버클리에 들어오고 나서, 생활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제가 버클리에 있을 때 파티를 찾으려면 한주 내내 사람들이랑 뭐 재미난 일이 없는지 이야기하며 찾는 수 밖에 없었죠. 페이스북이 나오고 나서, 주말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모든 기능이 있었죠. 우리들을 위한 모든 것이요.



페이스북이 실리콘 밸리의 심장 스탠포드 대학에 들어간 것은 꽤 이른 시점, 2004년 3월이었다.

숀 파커: 포톨라 밸리에 있던 제 룸메이트들이 전부 스탠포드로 갔던 때죠.

애즈라 캘러한: 2003년 저는 스탠포드를 졸업했습니다. 그 해 친구 네 명과 함께 학교 근처에 방이 딸린 집을 빌렸죠. 스탠포드 알럼나이 이메일리스트를 통해 같이 살 룸메이트를 구하기 시작했어요. 숀 파커라는 사람에게서 이메일을 받았죠. 우연히 그와 같이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우리는 당시 꽤 화제였던 냅스터가 돈은 정작 별로 벌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숀 파커: 룸메이트 중 한 명의 여자친구가 페이스북을 쓰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거 알지? 그거 프렌즈스터랑 마이스페이스랑 비슷한거야’고 했죠. 그런데 그녀는 ‘그래, 근데 요즘 대학생 중에 마이스페이스 쓰는 사람은 없을걸’이라더군요. 마이스페이스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마크 주커버그: 마이스페이스는 1/3의 직원이 성인물 모니터링에 투입되었습니다. 페이스북에서는 그렇지 않았죠. 실명 기반의 진짜 소셜 네트워크였기 때문이에요. 

애덤 디 앤젤로 (주커버그의 고등학교 해킹친구): 실명. 실명이었던 것이 중요했죠. 

애론 시틱: 우리에게 그 원칙은 일찍부터 확고했습니다. (최초의 소셜 네트워크라 할 수 있는) Well에서 배운 몇 가지 커뮤니티 원칙이 있기 때문이죠. ‘1) 각자는 각자가 한 말의 주인이다. 2) 서비스는 그 말을 서비스보다 멀리 가져간다.’ 우리는 언제나 콘텐츠를 통해 특정 인물을 역추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스튜어트 브랜드(최초의 소셜 네트워크 ‘Well’의 창업자): Well도 그런 추적 가능한 장치를 갖고 있었어야 했어요. 하지만 그렇지 못했죠. 가장 큰 실수 중 하나입니다. 

마크 주커버그: 역추적이라는 복잡한 기술적 문제를 쉽게 풀기 위해서는, 이렇게 간단한 사회적 해결책이 있으면 되는거죠.

애즈라 캘러한: 페이스북 초기버전은 해킹 당해도 할 말이 없는 단순한 웹사이트였습니다. 아주 기본적인 폼으로 이루어져 있었죠. 곧 페이스북의 프로필이었습니다. 

가운데가 루치 상비

루치 상비 (페이스북 뉴스피드 개발자): 작은 프로필 사진이 있었죠. 그리고 옆에는 ‘여기가 제 프로필입니다’라고 써있었어요. ‘친구들이 뭐하는지 보세요’라고 써있는 곳에는 서너 개의 링크와 한 두개의 박스가 있을 뿐이었죠. 

애론 시틱: 그런데 전 여러분이 제품에 얼마나 집중했는지, 얼마나 명확하게 만들었는지에 감동받았습니다. 아주 작은 디테일들이 이 프로필이 당신이라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었으니까요. 소셜 네트워크라는 것은 당시엔 정말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습니다. 그래서 보통이라면 제품이 나오고 나서 몇 년이 지나서야 그 행태가 자리잡는데, 페이스북은 초기부터 그걸 갖추고 있었어요. 

숀 파커: 그래서 전 그걸 보고 페이스북에 있는 이메일 주소로 바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저는 프렌즈스터에서 잠시 일했었고, 여러분과 페이스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아직까지 왜 뉴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뉴욕에서 만났습니다. 마크와 저는 제품 디자인과 제품의 전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죠. 

애론 시틱: 그 때 숀 파커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는 대뜸 “이봐 나 지금 뉴욕이야. 나 방금 마크 주커버그 그 꼬맹이와 만나고 왔어, 그 똑똑한 친구. 그 페이스북을 만든 친구 말이야. 근데 그 친구가 말하길 런칭되면 모든 것을 바꿔버릴 만한 ‘비밀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게 뭔지는 말을 안해줬어. 미칠 것 같아. 이게 뭔지 전혀 모르겠거든. 이거 혹시 아는게 있어? 아니 뭔지 알아낼 수 있겠어? 추측되는 거라도 있어?”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잠시 이것저것 얘기를 나눴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한 그 엄청난 ‘비밀 기능’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에 대해 일종의 강박증 같은 게 생길 지경이었죠.



숀 파커와 만난 지 두 달, 마크 주커버그는 기숙사에서 시작했던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실제 사업화해서 실리콘 밸리로 가져갔다. 그와 함께 했던 이는 공동창업자 콘실리에르, 더스틴 모스코비츠, 그리고 두어 명의 인턴이었다. 

마크 주커버그: 실리콘 밸리의 팔로 알토는 모든 테크 회사들이 태어난 신화적 곳이었습니다. 그걸 확인하고 싶었어요.

루치 상비: 페이스북이 실리콘 밸리로 이사갔다는 것을 듣고 꽤 놀랐습니다. 여전히 하버드 기숙사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애즈라 캘러한: 2004년 여름은 그 운명적인 일련의 과정들이 일어난 때입니다. 그 전설은 숀 파커와 페이스북 창업자들이 뉴욕에서 서로 만난 후 시작됩니다. 저와 숀이 같이 살던 집에서 떠난 지 일주일 뒤였습니다. 숀은 그의 여자친구의 부모님과 좀 갈등이 있었거든요. 

숀 파커: 집 밖으로 걸어나왔는데, 후드를 입은 애들 몇몇이 제게 걸어왔어요. 담배를 물고 말썽을 피우는 그런 고등학생인 줄 알았죠. 그런데 제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무슨 이런 우연이 다있나 싶은데 제 이름을 다시 부르더군요. 돌아봤어요. ‘숀, 여기서 뭐해요?’ 라고 묻더라고요.

30초 가량은 멍했습니다. 그리곤 그들이 마크 주커버그와 더스틴, 페이스북 초기 멤버들이라는 걸 알았어요. 전 ‘아니 너네야말로 여기서 뭐해?’라고 물었죠. ‘저희 여기 사는데요’라더군요. ‘엥, 나도 여기 사는데?’라고 하는데, 진짜 신기한 일이었어요. 

애론 시틱: 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가 이러더군요. “이봐,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못믿을거야.” 그리고 그는 “당장 이리로 와서 이 애들을 만나봐. 지금 당장, 바로 돌아와서 얘네 좀 봐봐!”

숀 파커: 심지어 저는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정도였어요. 걔네 집에 가서 노는게 편해졌다는 것 외에는요. 그건 딱히 공식적인 무엇도 아니었죠. 

애론 시틱: 마크네 집에 가서 그 친구들을 만나봤습니다. 일에 어찌나 집중하는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가끔 쉬기는 했습니다만, 대부분은 그들은 부엌 테이블에 앉아 랩탑에 머리를 박고 지냈습니다.

일주일에 두 세번은 걔네 집에 갔는데, 갈 때마다 제가 보던 것은 같았어요. 테이블에 둘러앉아 코딩, 코딩, 코딩을 하며 제품을 만드는 것 뿐이었죠. 마크가 원했던 것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제품을 개선하거나, 제품을 개선하기 위한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쉬거나. 가끔 영화를 보러 갈 때 빼고는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어요.

애즈라 캘러한: 페이스북의 초기는 문화랄게 없었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가 꿈틀대기도 했죠. 대학 신입생이 기숙사에서 사업을 차렸다고 상상해볼까요. 그 때 그들이 딱 그런 느낌이었어요. 

마크 주커버그: 꼬꼬마들이 한 집에 모여 살면서 미친 듯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낮밤은 바뀌고, 사무실에 출근하거나 사람을 뽑거나 하지도 않았어요. 집에 모여 가끔 쉬면서 담배피고 파티하고. 뭐 이렇게 하는 곳은 잘 없겠죠. 

애즈라 캘러한: 거실에는 모니터와 워크스테이션이 널려있었습니다. 화이트보드는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있었죠. 사무실이었어요. 



당시 마크 주커버그는 파일공유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의 원대한 실리콘 밸리 여름 계획은 냅스터의 부활이었다. 냅스터 자체의 부활이라기보다 페이스북 의 기능으로써였다. 주커버그의 이 프로젝트 이름은 Wirehog 였다.

애론 시틱: Wirehog은 마크가 이야기했던, 판을 뒤집을 수 있을 만한 비밀 기능이었습니다. 마크는 페이스북을 진짜로 유명하게 만들어 주고, 학교 내에서 페이스북의 위치를 독보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주변 사람들과 파일(대부분 음악)을 주고받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마크 핀커스: 그 친구들이 만든 이 기능은 냅스터 같았습니다. 다른 누군가의 컴퓨터에 어떤 음악파일이 있는지 볼 수 있었죠. 
애즈라 캘러한: 그런데 그 때는 냅스터가 불특정 개인들과 파일을 공유하는 걸로 엔터테인먼트 업계와 법원들로부터 탈탈 털리고 있던 때였습니다. 야생의 시대는 이미 끝나가고 있었죠. 

애론 시틱: Wirehog 프로젝트가 페이스북에 사진 공유 기능조차 없을 때 일어난 해프닝이라는 걸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원래 음악 파일을 타겟으로 했던) Wirehog 프로젝트는 다른 사람들과 사진을 공유하는데 쓰이기 시작했죠. 모두는 각자 프로필에 박스를 갖고 있고, 거기에 사진을 올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서로의 박스에 방문해서 프로필 주인이 공유한 파일을 볼 수 있게 되었죠. 오디오일 수도, 비디오일 수도, 휴가 사진일 수도 있는 그것을 말이죠. 

애즈라 캘러한: 하지만 결국 파일 공유였죠. 제가 페이스북에 합류했을 무렵, 우리는 예상지도 못한 Wirehog의 새로운 용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고소당할텐데 뭐가 중요해?’ 그게 그때의 기조였어요. 

마크 핀커스: 전 냅스터를 창업했던 숀이 왜 음악 서비스 근처로 다시 가는지 궁금했어요.

애론 시틱: 제가 알기로, 당시 페이스북의 변호사 몇몇은 Wirehog이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이라 조언했습니다. 페이스북의 사용자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그 프로젝트는 자연스럽게 잊혀졌죠. 

애즈라 캘러한: 가입 요구가 빗발쳤습니다. 아직 100군데의 대학에서만 지원할 뿐이었지만,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이미 누군가를 통해 이 서비스에 대해 들어본 터였습니다. 사용량 증가도 미쳤었죠. 그 때 거실의 화이트보드에는 전부 다음은 어느 학교에 런칭할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의 이슈는 오로지 하나였습니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성장,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였죠. 

애론 시틱: 페이스북은 대학에서 시작했고, 하루만에 한 학교의 학부생 70%이 가입했습니다. 그 어떤 서비스도 페이스북 만큼 빠르게 성장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애즈라 캘러한: 우리가 성공을 향해 정확하게 가고 있다고 확신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성공인지는 점점 뚜렷이 알 수 있게 되었죠. 더스틴은 이미 페이스북을 10억 불짜리 회사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창업자들은 시작할 때부터 그런 야망이 있었습니다. 마크와 더스틴, 19살짜리 풋내기 두 명은 아주 자신만만했어요. 

마크 주커버그: 어느날 우리는 둘러 앉아 이야기했죠. ‘우리가 다시 학교로 돌아갈 일이 있을까?’ ‘에이 설마!’

애즈라 캘러한: 그 프라이드는 인정할만 했죠.

데이비드 최(그래피티 아티스트): 빼빼마른 숀은 괴짜였습니다. ‘페이스북에 내가 돈을 땡겨올거야, 저 망할 놈들 내가 콧대를 꺾어주지’라고 말하고 다녔죠. 제가 ‘아니 그걸 어떻게 할건데?’라고 물었고, 그의 답은 .. 플렉스였습니다. 완전 힙하게 머리를 잘랐고, 매일 밖에 나가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태닝을 했고, 멋진 수트를 사입었죠. 한껏 꾸미고 나서 미팅에 갔어요. 그리고.. 돈을 받아왔죠!

마크 핀커스: 그게 아마 2004년 9월, 10월 이 때일거에요. 전 포트레로 힐의 먼지 자욱한 벽돌건물에 있는 트리브 사무실에 있었죠. 트리브닷넷의 아이디어는 프렌즈스터와 크레이그리스트를 합친 거랑 비슷했죠. 회의실에 있는데, 숀이 ‘페이스북 가이’를 데려왔다는 겁니다. 마크 주커버그가 따라 들어왔습니다. 트레이닝 복에 아디다스 슬리퍼 차림이었습니다. 발을 테이블에 올린 채 앉아있는데, 완전 어린애였어요. 숀은 속사포처럼 페이스북이 하고자 하는 일과 성장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전 매료되었죠. 

저희 트리브는 그닥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정체기였죠. 벽에 머리를 박아가며 어떻게 성장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떤 꼬마 하나가 간단하지만 기가 막힌 아이디어로 그걸 해내고 있었던 것이죠. 일종의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한편으론 열등감으로 좀 짜증도 났죠. 그들의 간단한 아이디어는 뭔가 대단하고 복잡해 보이진 않았거든요. 제 기억이 맞다면 숀이 바로 사무실의 컴퓨터로 페이스북에 접속해서 저희에게 보여줬습니다. 사실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생들 서비스였으니까요. 하지만 처음 보는 순간, 놀라움에 빠졌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 전화번호와 주소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스스로 올리고 있었어요.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서비스를 신뢰하고 그런 정보를 올리고 있었어요. 숀은 이 모든 것을 빠르게 캐치해서 투자 라운드를 띄웠습니다. 그가 주커버그에게 중요한 조언을 하고 있었죠. 피터 티엘에게 50만 불을 받고, 저와 리드 호프만에게 3만 8천 불을 받는 것이었어요. 그건 (페이팔 마피아였던) 저희들이 소셜 바닥에서 무언가를 하는 그나마 몇 안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랬죠.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어요. 작았죠.


Beerpong


애즈라 캘러한: 12월이 되었습니다. 그새 뭔가 더 프로페셔널이 되었다거나 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마크나 더스틴과 같이 일하던 친구들은 복학하거나, 동부로 돌아가야 했죠. 상황은 심각해지고 있었어요. 처음 그들이 실리콘 밸리로 왔을 때보다 일은 훨씬 더 늘어났고요. 2005년 여름까지 사무실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임대 계약을 새로 해야 했어요. 계약을 마친 후, 숀이 갑자기 “내가 여기 길거리 아티스트를 좀 아는데, 그 친구한테 여기를 좀 꾸며달라고 하자”고 하더군요. 

데이비드 최: 제 계산으로 그 때 건물 외벽을 전부 칠하려면 6만 불 정도 들어갈 거라 말씀드렸습니다. 숀은 “돈으로 받을래 페이스북 주식으로 받을래?”라고 제안했어요.

데이비드 최

애즈라 캘러한: 숀은 결국 데이비드 최에게 그 대금을 페이스북 주식으로 지불했습니다. 

데이비드 최: 솔직히 페이스북에 관심이 1도 없었습니다. 그게 뭔지도 몰랐죠. 대학교 이메일이 있어야 쓸 수 있는 서비스라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전 운에 맡겨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감을 따르는거죠. 전 숀을 믿었습니다. 그 친구는 좀 아는 친구라 생각했거든요. 그에게 베팅을 했어요. 

애즈라 캘러한: 이사를 갔습니다.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었죠. 처음 봤을 때 느낌은.. “이런 미친, 그 양반이 우리 사무실에 무슨 짓을 한거지?”였어요. 저희 사무실은 2층에 있었습니다. 계단 위를 올라와 사무실을 보면, 3미터 짜리 벽에 그려진 그림을 볼 수 있었죠. 거대한 가슴을 가진 여자가 매드맥스 스타일의 옷을 입고, 불독을 타고 있는 그런 그림을 말이죠. 

무서웠어요. 적절하지도 않았죠. “이런 젠장 숀!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래피티에 동의한 건 그것이 문화를 만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숀이 그간 해온 것보다 더한 것이었어요. 그래피티는 어떤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올 때마다 불독을 타고 있는 그 여전사를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전투준비!’라고 외치는 것 같았죠. 

루치 상비: 음 맞아요. 그 그래피티는 좀 야했지만, 뭔가 달랐어요. 활기가 넘쳤고, 아주 구체적인 에너지를 우리에게 주는 느낌이었어요. 

케이티 제민더(페이스북 초기 프로젝트 매니저): 전 좋았어요. 근데 좀 과하긴 했죠. 좀 섹슈얼한 요소가 있었으니까요. 전 뭐 진짜로 신경을 쓰진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었으니까요. 근데 그것 보다 더 자극적인 것도 있었잖아요.

애즈라 캘러한: 데이비드의 그림 같진 않았어요. 나체로 뒤엉켜 있는 그 노골적인 레즈비언 그림은 숀 여자친구가 그린 것 아닌가 싶었죠. 호불호의 문제를 떠나 확실히 일하는 곳에 있을 만한 그림은 아니었어요. 너무 선정적이었죠. 결국 몇 주 뒤 철거되었죠. 

맥스 캘리 (페이스북의 첫 보안 담당자): 가로세로 10센티 정도 되는 그림이 하나 있었어요. 섹스하는 그림이었죠. 고객서비스팀 중 한 명이 그것을 너무 선정적이라고 하더군요. 매일 그것을 보는거라, 그것에 대한 불만이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근처 마트에서 금색 페인트를 사서, 그래피티 위에 적당히 덧칠했습니다. 얼렁뚱땅 가려지더군요. 이제 누군가 섹스하는 걸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었어요.

제프 로스차일드 (전업 투자가 출신 페이스북 직원): 날것이었습니다. 진짜 멋졌어요. 회사라기보다는 대학 기숙사 아니면 동아리 같은 느낌이었달까요.

케이티 제민더: 여기저기 담요가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게임기가 굴러다녔고, 장난감과 레고 천지였어요. 난장판이었죠. 

제프 로스차일드: 플레이스테이션도 있었죠. 오래된 소파도 있었는데, 거기서 자고 그랬죠. 

카렐 발룬 (페이스북 초기 개발자): 일주일에 2~3일 정도는 밤을 샜어요. 한 번은 사내 어워드에서 ‘책상 밑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상도 받은 적 있어요. 

제프 로스차일드: 술이 가득한 선반도 있었죠. 늦은 밤 일을 마치고 거기 모여 한 잔씩 하기도 했었는데요. 

애즈라 캘러한: 사무실에 술이 천지였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는데 맥주캔 따는 소리가 들리곤 했어요. 사무실에 나는 퀴퀴한 냄새는 무슨 쓰레기장도 아니고

루치 상비: 저희가 생맥주 케그를 갖고 있었거든요. 개발을 좀 했죠. 거기다가 카메라와 센서를 좀 달아놓고, 근처에 누가 접근하는지 감지한 다음 실시간으로 포스팅을 하게 했어요. 누가 케그에 오면 사진을 찍고 ‘00이 케그에 있다’라고 포스팅을 했어요. 특허까지 등록했죠. 

애즈라 캘러한: 처음 이사와서 자물쇠를 세팅했습니다. 아침 9시마다 자동으로 잠금을 해제하는 것이었죠. 저는 9시에 출근했는데요. 그러면 진짜 모든 걸 훔쳐갈 수도 있었어요. 아무도 점심 이전에 출근하지 않았으니까요. 페이스북 직원들을 기본적으로 모두 야행성이었습니다. 

케이티 제민더: 그 애들은, 아 여기서 애들이란 말 그대로 애들이에요. 애들. 보통 11시~12시는 되어야 기어나왔죠. 

루치 상비: 가끔씩 파자마 차림으로 출근했어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죠. 대학의 연장선 같았어요. 모두가 같은 시기, 같은 경험을 했죠. 일하는 건 정말 환상적이었죠. 짜릿했죠. 일이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어요. 마치 항상 친구들이랑 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죠. 

애즈라 캘러한: 놀러가는 거였죠. 친구들이랑 술마시고, 친구들이랑 데이트하고..

루치 상비: 페이스북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들을 발견해 나갔습니다. 결혼을 하고, 가족을 갖게 되었죠. 

케이티 제민더: 흠.. 만약 초창기 페이스북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이혼율이 75퍼센트는 될 것 같아요. 

맥스 캘리: 아 점심 때의 사건도 있었습니다. 사무실에서 점심을 해주던 쉐프는 뭔가 멘탈이 들쑥날쑥 했어요. 음식들에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었죠. 한 번은 생선요리에서 벌레가 나온 적도 있어요. 끔찍했죠. 보통 전 3시까지 일을 하고 밤에 사무실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누가 무엇을 런칭하는지, 누가 무엇을 준비 중인지, 무슨 소문이 도는지, 무슨 일이 릴어나고 있는지.

스티브 펄만 (아타리 시대때부터 있었던 실리콘 밸리 베테랑): 저희 회사는 페이스북이랑 휴게공간을 공유하고 있었어요. 얼굴 인식 기기를 만들어봤죠. 페이스북 친구들은 뭔가 html 관련한 걸 하는 것 같은데, 오전 느지막히 등장해서 점심을 먹곤 오후가 다 되어서야 자리를 떠났죠. 와 저런 인생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저런 스타트업이 필요하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우리 모두가 페이스북에게 느낀 건, 사람들은 참 좋은데, 퇴근을 안한다는 것이었어요. 


소셜그래프

맥스 캘리: 4시 정도에 팀 미팅을 하곤 했습니다. 아젠다는 ‘오늘 저녁은 뭐먹지?’였죠. 보통 바에 갔습니다. 다섯에서 여덟 정도 그룹을 이뤄 대학가 근처의 각자 다른 바에 가서 저녁을 먹곤 했죠. 

루치 상비: 저녁엔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었죠. ‘가설을 세워볼까요. 이 네트워크가 그래프라면 두 사람 사이 가중치는 얼마나 될까요. 사람과 사진 사이의 가중치는? 그걸 어떻게 시각화할까? 이 네트워크는 결과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가 이 네트워크를 가질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숀 파커: “소셜 그래프”라는 건 그래프 이론의 수학 개념에서 따온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고 있던 제품이 수 많은 노드들 사이에 떠다니는 정보 사이의 네트워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였죠. 그것이 그래프 이론이었고요. 처음부터 우리는 소셜 그래프를 만들고 있었습니다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았죠. 좀 어려운 개념이었거든요. 수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는 누군가에게,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을 설명해야 할 때 그래프 이론을 가져와 이야기했죠. 

루치 상비: 돌이켜보면, 저희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건 믿기지 않아요. 뭔가 되게 어른 같은 일 같잖아요. 우리는 그냥 둘러 앉아 떠들었을 뿐이었어요. 팀 멤버에만 국한되지도 않았죠. 뭔가 목표가 정해졌다기보다, 순수하게 지적 유희를 위한 그리고 모두에게 열린 그런 자리였어요. 

맥스 캘리: 매번 항상 새벽까지 마실 기세로 술자리를 시작했지만, 9시쯤 되면 하나씩 정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밤에 출시할 것이 뭐지? 자 어디까지 준비되었고 어디부턴 되지 않았지?’ 11시 쯤 되면, 모두 각자가 무엇을 그 날 밤에 해야 할지 알 수 있었죠. 

케이티 제민더: 뭔가 격렬하게 치고받고 하진 않았어요. 뜨겁게 하지만 은밀하게 일하는 개발자들 집단이었죠. 우린 개발했고 개발이 끝난 늦은 밤 즉시 배포했습니다. 테스트는 없었어요. 그냥 배포했죠. 

애즈라 캘러한: 대부분 웹서비스들은 테스트를 빡세게 하잖아요. 근데 그건 우리 방식이 아니었어요. 

루치 상비: 그저 배포 버튼만 누르면 코드가 바로 실 서버에 올라가버려야 했어요. ‘빠르게 움직이고 처리한다’는 철학을 극단적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죠. 주간 정기배포, 일간 정기배포 이런 것은 없었어요. 코드가 준비되었다면, 바로 그 즉시 사용자들에게 나가야 했죠. 아, 근데 그건 악몽이기도 했죠. 

케이티 제민더: 우리 서버가 버틸 수 있을까? 보안상 구멍이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일단 실 서비스에 반영해놓고 이슈가 있는지 지켜보는 쪽이었어요.

제프 로스차일드: ‘해커의 방식’이었죠. 일단 해치우는 것. 이게 10명 정도 규모에서는 잘 동작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조직이 커지고 서비스가 커지면 서비스가 죽지 않게 하는데 시간을 써야했죠. 우리에겐 규율이 필요했어요. 

루치 상비: 그래서 저희는 밤에만 코드를 배포하기로 했어요. 만에 하나 잘못되어도 상대적으로 영향이 작을 것 같았으니까요. 그런데 그것도 완전 별로였죠. 매일 새벽 서너시 까지 깨어있어야 했어요. 배포한 코드가 어디서 어느 코드와 어떻게 잘못될지 모르기 때문에, 코드에 손 댄 사람 모두가 붙어있어야 했거든요. 

맥스 캘리: 새벽 한 시쯤이면 망했든 잘됐든 아무튼 결과를 알 수 있었습니다. 결과가 좋았다면, 모두 ‘우후!’라고 크게 외친 뒤 자러 갔죠. 망했다면.. 그 때부터 해야하는 거죠. 고치든, 롤백하든. 

케이티 제민더: 새벽 두 시가 보통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이었죠. 

루치 상비: 디펙을 잡고, 잡고 또 잡고 하다보면 이게 새벽 세 시, 네 시, 다섯 시까지 갔어요. 

맥스 캘리: 새벽 4시쯤에도 문제가 안잡힌다 치면, 롤백을 고려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저희 팀은 새벽 6시까지 깨어있었거든요. 4시 부터 6시 정도까지 적당히 누울 자리를 찾고 눈을 붙였죠. 이 짓을 하루도 빠짐 없이 9개월 동안 반복했어요. 완전 미친 짓이었죠. 

제프 로스차일드: 일주일에 7일 일했습니다. 항상 일을 하고 있어야 했어요. 자기 전이면 전 항상 물을 한 가득 마시고 잤어요. 두 시간 안에 (화장실을 가기 위해) 깨서 이슈가 없는지 체크해야 하기 때문이었죠. 하루 24시간, 퇴근 같은 것은 없었어요. 

케이티 제민더: 누군가의 가족이 된다거나, 보통의 일상을 사는 사람에게는 아주 힘든 일입니다. 나이도 들고 결혼도 했는데 일만 그렇게 한다는 건, 가족에 헌신하지 않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줬죠. 분명히요. 



마크 주커버그: 체스 챔피언들 대부분은 왜 서른 이하일까요. 어린 친구들의 일상은 상대적으로 단순합니다. 아마 차가 없을테고, 책임질 가족이 없겠죠. 그 때의 저는 그저 매트리스 하나 뿐이었거든요. 

케이티 제민더: 아 마크, 님이 서른이 넘었는데 직장 상사가 그런 소리를 한다고 생각해봐요!

마크 주커버그: 음 그냥. 어린 사람들이 더 똑똑해요.

루치 상비: 그 때 우린 너무 어렸어요. 에너지가 넘쳐났으니 할 수 있었죠.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야기해도 제대로 된 팀은 아니었어요. 특히 시니어들에게는 재앙 같았죠. 많은 일들이 그들이 퇴근하고 없는 밤에 일어났고, 다음날 아침이면 그들은 밤새 일어난 변화를 갑작스럽게 받아들여야 했어요. 그런데 그땐, 그게 재미있었어요. 

애즈라 캘러한: 페이스북 첫 100명 정도는 이미 먼저 일하고 있던 개발자나 운영팀 누군가의 친구였습니다. 갓 졸업한 사람들이 많았죠. 우리가 사무실로 이사를 하며 대학 동아리 같은 문화가 도드라졌고 조금씩 변화가기 시작했죠. 여전히 기숙사 같은 느낌이었지만 완전히 대학생 같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른들도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제프 로스차일드: 저는 2005년 5월에 입사했습니다. 그 때 사무실 밖 길가에 피자집 메뉴판이 붙어있었는데, 거기 요리사 캐리커쳐 아래 구인 정보가 써있었어요. 그게 당시 페이스북의 채용이었어요. 

숀 파커: 그 당시 대학가에는 구글이 모든 것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훌륭한 개발자들은 모두 구글로 갔어요. 

케이트 로스 (초기 고객 서비스 담당자): 저는 구글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았어요. 페이스북이 가장 쿨한 곳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구글보다 더 쿨해보였으니까요. 당시 구글은 한 편으로 이미 괴짜인척 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페이스북은 괴짜인데 괴짜인 걸 숨기고 싶어하는 사람들 같았죠. 페이스북은 소셜 네트워크였어요. 그래서 진짜 일반적인 미국 사람들이 어울리고 노는 사회적 요소들이 필요했죠. 맥주 원 샷(비어퐁)같은. 

케이티 제민더: 사무실 아래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개발자 대여섯이 모여 살았죠. 비어퐁 파티가 자주 열렸습니다. 어린애들 모임 같았죠. 

테리 위노그라드 (스탠포드의 저명한 컴퓨터학과 교수): 이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페이스북은 졸업 전 학생들의 문화에 가까웠고, 구글은 졸업 후 동문들의 문화에 가까웠다고요. 


포토태깅


제프 로스차일드: 페이스북에 입사하기 전에는 이 친구들이 데이트 서비스를 만드는 줄 알았습니다. 페이스북의 의미를 진짜로 이해하는데 몇 주가 걸렸죠. 마크는 소셜 네트워크가 아니라고 했어요. “이것은 소셜 네트워크가 아니에요. 우리가 실제 아는 사람들과 쓸 수 있는 사회적 도구입니다”라고 주장하곤 했죠. 

마이스페이스는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묶어주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었습니다. 페이스북도 어떤 면에서는 같은 형태라고 볼 수 있었죠. 그런데 사용자 개개인이 성취하는 문제는 서로 달랐습니다. 페이스북은 지인 사이의 네트워크와 커뮤니케이션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죠.

맥스 캘리: 마크가 제 옆에 앉아 페이스북에 대한 그의 비전을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페이스북을 통해 사람들을 연결하고 인생과 연결된 모든 가치를 보존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우리가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어떻게 인생이 바뀌든 상관 없다고도요. 왜냐하면 페이스북을 통해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들과 연결되어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가 말했습니다. 

듣자마자 그와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만들어내고 싶었죠. 90년대 우리는 모두 인터넷에 대한 환상이 있었습니다. 그 환상, 모두가 연결되어 모두가 모든 것을 공유하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는 순수한 인터넷으로의 회귀 같았어요. 페이스북은 그 순수함이었습니다. 어린 마크가 그것을 알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본능적으로 그 친구는 8,90년대의 인터넷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페이스북에 와서 그 이상을 다시 들었죠. 저는 그걸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요. 매력적인 순간이었죠. 

애론 시틱: 그래서 바로 그 2005년 여름. 마크가 저희 모두를 앉혀놓고 말했습니다. “이번 여름에 다섯 가지를 할 거야”라고 말이죠. 사이트를 리스트렁처링하고, 모든 친구들의 활동을 볼 수 있게 하는 ‘뉴스피드’라는 것을 만들 것이며, 사진 기능을 추가할 것이고, 지역 이벤트 기능으로 파티를 알아볼 수 있게 할 것이고, 지역의 경제활동을 담아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것들이 완료되면 사이트 디자인을 개편하기로 했죠. 전 사진 프로젝트 담당이었어요. 

애즈라 캘러한: 그 때 페이스북은 너무 간단했어요. 프로필 뿐이었죠. 뉴스피드 같은 건 없었고, 엄청 기초적인 메시지 기능이랑 파티를 위한 캘린더 기능 정도 밖에 없었어요. 사이트에 프로필 사진을 제외한 사진을 올릴 수도 없었죠. 뭔가 업데이트가 있을 때 사용자에게 알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프로필을 집착적으로 보고 있어야 겨우 사진을 바꾼 걸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죠. 

애론 시틱: 어떤 사용자들은 찍은 사진을 공유하기 위해 한 시간마다 한 번씩 프로필 사진을 바꿀 정도였으니까요. 

스캇 말렛: 사진 공유는 가장 요청이 많았던 기능입니다. 애론이랑 저는 회의실에서 화이트보드에 몇몇 페이지에 대한 구조를 그리고 사진을 위한 DB구조를 그렸죠. 한달 정도 뒤엔 내부 테스트를 하기엔 충분한 수준으로 기능을 모두 담은 프로토타입을 만들었습니다. 간단했죠. 사진을 올리면 앨범으로 가고, 앨범을 만들고, 사람들을 태그하는 것이었어요. 

제프 로스차일드: 사진 태깅은 애론의 아이디어였어요. 끝내주는 인사이트였죠. 정말 게임체인저였어요. 

애론 시틱: 사실 우리끼리는 사진에 핵심이 있을까라고 이야기했죠. 그게 진짜로 성공할 것이라 확신하지는 못했어요. 그냥 느낌이 좋았죠. 

페이스북 사진기능은 2005년 10월에 만들어졌다. 그 기능을 쓰는 사람은 500만 명이었고, 모두 대학생이었다. 

스캇 말렛: 하버드와 스탠포드에 저희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거기부터 런칭했죠. 

애론 시틱: 스크린 가득히 업로드 현황을 트래킹하는 어드민 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모두 모여 지켜봤죠. 사람들이 업로드하면, 그 화면에 뜨는 것이었죠. 첫 번째 업로드는 윈도우 배경화면이었습니다. 좀 실망이었어요. 음, 사람들이 이 기능을 이해하지 못했나? 아니면 별로 효과가 없나?

그런데 다음 사진은 어떤 남자가 친구들과 밖에서 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엔 서로 다른 무리의 여자들 사진이었어요. 세 명 사진, 네 명 사진, 두 명 사진 등등. 파티하는 사진들이 이어졌고, 멈추지 않았습니다. 

맥스 캘리: 모든 결혼식장의 사진, 모든 술집의 사진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남자의 .. 성기 사진도 있었죠. 멋진 것과 망할 것 모두가 있었어요. 

애론 시틱: 하루 만에 올라오고 태그된 것이 700건이었습니다. 

제프 로스차일드: 삼 개월 동안 그 어떤 웹사이트보다 더 많은 사진이 공유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답은 태깅이었어요. 아무도 ‘누군가 당신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습니다’라는 알림을 받아보지 못했을 거에요. 하지만 그 알림을 받아보면, 들어갈 수 밖에 없죠.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애즈라 캘러한: 그 때까지 가장 큰 성장 메커니즘은 사진 태깅이었습니다. 그것이 다른 모든 제품들의 모습까지 결정했죠. 사람들이 페이스북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였습니다. 페이스북의 변화와 뉴스피드의 아이디어가 싹트기 시작하는 변화의 순간이었으며, 대학을 넘어 사회 전체로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결책과도 같았습니다. 



뉴스피드

제프 로스차일드: ‘뉴스피드’프로젝트는 2005년 가을에 시작되었습니다. 이듬해인 2006년 런칭했죠. 

더스틴 모스코비츠: 뉴스피드는 바이럴 분포의 개념을 담고 있는 모습이었죠.

애즈라 캘러한: 뉴스피드야말로 오늘날 페이스북의 근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숀 파커: 처음엔 내부에선 뉴스피드를 “What’s New”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처음엔 그냥 상태의 업데이트, 프로필 변경 등 네트워크 상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것들을 모아놓은 것이었죠. 

케이티 제민더: 개념적으로, 각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두에게 보여줄 수 없습니다. 로직이 들어가고, 로직이 선택한 이야기들의 집합이죠. 뉴스피드엔 논리적으로 두 개의 스트림이 존재합니다. 각자가 (직접) 한 일, 그 사람이 네트워크 상에서 한 (간접적인) 일. 

애즈라 캘러한: 그래서 뉴스피드는 홈페이지처럼 정적이고 재미없는 공간이 아닌, 사용자 주변과 사용자의 관심사가 끊임없이 업데이트 되는 동적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마치 신문처럼 말이죠. 

루치 상비: 이 아이디어는 정말 끝내줬어요. 보통 우리가 생각하기에 신문이라면 발행자가 말하고 싶은 걸 전날 밤에 확정한 다음 일괄적으로 편집부가 발송하는 구조니까요. 하지만 페이스북의 뉴스피드는 수천만개의 다른 신문을 실시간으로 만듭니다. 개인별로 모두 개인화되기 때문이죠. 

애즈라 캘러한: 정말 프로덕트 측면에서 기념비적인 일이라 할 수 있어요. 이 개념을 구현한 것도, 이를 모든 사용자에게 적용하기 위해 처리해야 하는 데이터의 실시간 스케일에서도 말이죠. 

루치 상비: 저흰 그걸 위해 1년 반을 연구했어요.

애즈라 캘러한: 공학적으로 아주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각자가 가장 관심있어 할 만한 것을 스트림으로 실시간으로 가져온다는 것은요.

루치 상비: 당시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가장 큰 분산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아주 혁신적이었죠.

애즈라 캘러한: 우리는 사내버전으로 먼저 만든 다음 몇 주 동안 좀 갖고 놀아봤어요. 정말 드문 경험이었죠. 

케이티 제민더: ‘좋아요. 그런데 이젠 어느 정도 사용자 테스트를 해볼 필요가 있겠어요’라고 했던 것이 기억나요. 마크에게 가서 몇 명의 사용자를 데려와 앉혀놓고 유리문 뒤에 앉아 그들이 우리 제품을 잘 쓰는지 관찰해야 한다고 설득했죠. 마크도 그렇고 더스틴도 그렇고 많이들 시큰둥했어요. 시간낭비라고 생각했죠. 그들 중 한 명은 실제로, ‘에이, 우리 사용자들은 바보에요’라고 말하기까지 했다니까요.

애즈라 캘러한: 그 때가 우리의 첫 사용자 테스트였어요. 그 때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 뚜렷했죠. 사람들은 ‘이런, 못 볼 것을 보고야 말았군. 이건 좀 아닌거 같은데’라고 생각하는 듯했어요. 왜냐하면 사진을 바꾼 것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음은 물론, 각자가 페이스북의 네트워크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실시간으로 공유되었기 때문이죠. 첫 반응은 다들 이런식이었죠. 오마이갓! 내 행동이 모두에게 노출되잖아! 모두가 내가 하는 모든 것을 페이스북에서 볼 수 있어!

맥스 캘리: 하지만 뉴스피드에 대한 우리 내부의 믿음은 강했어요. 우린 정말 뉴스피드를 사랑했죠. 

애즈라 캘러한: 내부에서는 이 아이디어가 그대로 런칭되지 못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이건 너무 급진적인 제품이으니까요. 우린 점진적으로, 사용자들을 변화에 적응시켜가며 가야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마크가 단호하게 말했죠. “우린, 이걸 할 겁니다. 페이스북은 이 제품을 런칭할 것입니다. 상처의 반창고를 뜯어내듯 말이죠.” 

루치 상비: 새벽녘에 그 기능을 배포했습니다. 서로 축하했고 우린 흥분했죠. 다음날 우리는 롤백을 각오한 채 일어났습니다. 전 회사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죠. ‘페이스북이 환골탈태했다’

케이티 제민더: 사용자 대상 공지도 하나 준비했습니다. 그 끝에 버튼을 하나 넣었고, ‘awesome!’이라고 써넣었죠. ‘okay’가 아닌, ‘awesome’. 당돌했죠. 스크린샷이라도 떠놓을 걸 그랬어요. 아무튼 진짜 그랬어요. 사용자들은 페이스북에 들어온 뒤 새로운 기능이 적용된 걸 보았고, 이 공지를 보았죠. 우린 사용자에게 선택지를 주지도 않았고, 상세히 설명하지도 않았어요. 사람들은 경악했죠. 

제프 로스차일드: 사람들은 난처해했습니다. 뭔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러나 엄밀히 그것은 사실이 아니죠. 프로필에 올라가는 모든 건, 사실 사람들이 프로필 방문자에게 노출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 올렸던 것이었으니까요.

루치 상비: 사용자들은 반발했습니다. 페이스북을 탈퇴할거라고 협박했죠. 사람들은 그들의 권리와 프라이버시가 침해당했다고 느꼈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법원에 탄원을 넣으려 연대하기도 했습니다. 사무실 밖에 줄지어 사있는 그들 때문에, 우린 보안 요원을 고용해야 할 정도였어요. 

케이티 제민더: 사무실 밖에 카메라맨들이 있었습니다. “이전 페이스북을 돌려내라!” 라고 시위가 있었어요. 

제프 로스차일드: 꽤 격렬했죠. 사무실로 행진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죠. ‘뉴스피드를 반대하는 페이스북 그룹’이 조직되었고 이틀 만에 백만 명이 가입했습니다.

루치 상비: 그룹에 있던 몇몇은 “루치는 악마다”라고 하기까지 했어요. 왜냐면 제가 블로그에 글을 썼기 때문입니다.

맥스 캘리: 사용자들로부터 시작된 싸움은 매일 우리를 때리고 고객서비스를 때려댔습니다. “이건 망했어! 최악이야!” 라는 내부 목소리도 있었죠.

애즈라 캘러한: 지인이나 친구로부터 이메일도 많이 받았습니다. “무슨짓을 한거야? 끔찍해! 되돌려놔!” 라고 하는 것들을요.

케이티 제민더: 사무실에 앉아서 밖에 있는 시위대를 보면서 되뇌이던 때였어요. “이거 롤백해야하나? 롤백해야하나?”

루치 상비: 전체 중 10%의 사용자가 제품을 보이콧한다면 진짜로 그만두려고 했어요. 근데 특이한 패턴이 하나 일어나는걸 보았습니다.

맥스 캘리: 사용자들의 사용 흐름을 보니 우리에게 그게 끔찍하다고 말하던 사람들조차 그런 식이었어요. 이런 미친, 계속 쓰고 있잖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루치 상비: 시위와 탄원 그리고 항의하려 사무실에 방문하는 그런 이들도, 제품을 점점 더 파고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실 잘 쓰고 있었어요. 이전과 비교해서 두 배나 더 말이죠.

애즈라 캘러한: 직원 모두가 감정적으로 크게 흔들렸던 며칠이었습니다. 특히 강경하게 하지말라고 말려댔던 사람들에게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그들은 ‘이럴 줄 알았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루치 상비: 마크는 동부에 첫 기자회견을 하러 갔습니다. 저희는 팔로알토에서 문제를 대응하고 있었고요. 로그를 보고 업무를 처리하며, 이게 실제로는 동작하고 있다고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기능을 닫기 전에 마지막 몇 가지를 시도하려고 했죠. 

케이티 제민더: 이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몇 가지 프라이버시 기능을 긴급히 추가했습니다. 

루치 상비: 딱 24시간, 24시간 만 달라고 했죠.

케이티 제민더: 조악한 작은 슬라이더 바로 이루어진 “오디오 믹서” 프라이버시 컨트롤을 만들었습니다. 이걸로 기능을 켜고 끌 수 있었죠. 예쁘고 멋졌지만, 사실 기능에 썩 좋은 메타포는 아니었죠.

제프 로스차일드: 솔직히 전 그거 실제로 아무도 안쓸거라고 생각했어요. 

애즈라 캘러한: 어쨌든 그 컨트롤은 배포되었습니다. 즉각적인 소요는 진정되었죠. 사람들은 이내 뉴스피드가 딱 자신들이 원하는 그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빙고! 뉴스피드는 페이스북을 수 천 배 더 강력하게 만들었죠. 

케이티 제민더: 사진과 뉴스피드. 짜잔! 제품의 핵심적인 기능이 추가되고 그 네트워크가 변화하며 페이스북은 한 단계 더 올라섰습니다. 

제프 로스차일드: 페이스북은 사용성은 뉴스피드가 런칭되자마자 폭증했습니다. 가입제한을 풀었을 때(.edu 메일주소 이외 가입 허용)와 같이 말이죠. 

애즈라 캘러한: 일반 사용자에게 오픈되면, 페이스북이 전 세계 사람들의 네트워크 서비스가 되는 길이 열릴 것이라는게 명백했습니다. 

제프 로스차일드: 이 두 가지가 페이스북이 거대한 서비스로 성장할 수 있었던 변곡점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위한 틈새시장 제품이었을 뿐이지만요.

마크 주커버그: 정복 dominance!

루치 상비: “정복”은 당시 페이스북의 큰 만트라 같은거였습니다.

맥스 캘리: 회사에서 “정복”이라고 외치던 회의가 기억나네요.

애즈라 캘러한: 우리는 자주 파티를 열였는데, 2005년 이후 마크의 건배사는 항상 “정복!”으로 끝났어요.

마크 주커버그: 정복!


정복

맥스 캘리: 야후!의 인수제안을 거절했던 그 미팅이 특히 기억나요.

마크 핀커스: 2006년에 야후!가 페이스북에게 12억 불을 제안했습니다. 헉 소리나는 제안이라 생각했어요. 거절하는 걸 상상하긴 어려웠죠. 냅스터가 엎어지고, 프렌드스터와 마이스페이스가 무너지는 중에 수익이 아직 없는 이 회사에게 내로라 하는 회사가 10억 하고도 2억 불을 더 제안했을 때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요. 이런 엄청난 제안에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 마크에 대해서는 리스펙트 해야 합니다.

더스틴 모스코비츠: 전 야후!가 우리를 사도 감당 못할 것이라 확신했어요. 그리고 숀은 제게 합병의 90%는 실패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고요.

마크 핀커스: 운이 좋게도, 시대가 주커버그의 편이었는지 야후!의 주가는 하락했습니다. 야후!는 자사의 주식으로 제안했는데 주가가 빠져서 제안가격이 8억 불 정도까지 떨어졌죠. 제 생각에 마크는 이미 감정적으로 내키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제안가격의 하락은 그를 확신하게 했죠. 야후!가 만약 현금을 더 들고 와서 12억 불 이상을 베팅했다면 마크가 아니라고 말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페이스북이 야후!의 한 부서가 되어있을 수도 있고요. 

맥스 캘리: 우린 말 그대로 야후!의 제안을 찢어버렸습니다. 저흰 그랬습니다. “엿이나 먹으라지, 걔들 우리가 사버릴거야!”

마크 주커버그: 정복!!!

케이트 로스: 그는 약간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얘기했습니다. 진지하거나 무섭게 “정복”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좀 특이했죠. 이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걸 생각할 때 특히 그랬죠. 음, 사람들은 알까요? 어떤 생각을 가진 몇몇이 만든 구조를 통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리고 각자의 취향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서로의 상호작용이 설계되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요.

애즈라 캘러한: ’20대 초반 부유한 백인들의 관점으로 설계된 인터넷’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사회학자들이 앞으로 평생 연구해야 할 질문인 것 같아요. 

케이트 로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향력 있는 소수의 가치관이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스티븐 존슨: 전 이에 대한 정당성 논쟁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페이스북은 에코 챔버/확증편향 문제와 정치적 양극화 문제를 가속화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터넷이 사람들의 생각보다 영향력이 덜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어요. 

마크 핀커스: 제가 너무 내부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조금 멀리서 바라보면 아무도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인터넷은 그냥 인터넷이에요. 그 내재적 방향대로 가고 있죠. 우리는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 제공합니다. 고객이 원하는게 거대한 에코 챔버와 허영심 가득한 세상이라면, 그걸 제공해주는 이들이 승리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승리하지 못하겠죠.

스티브 잡스: 페이스북 생태계 바깥에 있는 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곳을 정복했어요. 

마크 핀커스: 저는 몇몇의 대학생들이 인터넷을 조직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들이 먼저 도착했을 뿐이에요.

Mark Zuckerberg (L) and Chris Hughes (R)

마크 주커버그: 정복!!!!

애즈라 캘러한: 결국 우리는 상임이사회를 열어서 결국 마크에게 정식으로 요구했어요. “마크, 제발, 제발 ‘정복’이라는 단어 좀 쓰지 마세요”

숀 파커: 진짜 정복자가 되어버리고 나면, 그 단어는 반독점법에 위배되는 단어가 되니까요.

스티븐 존슨: 인터넷 사용자가 10억 명이 되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 페이스북은 10억 명의 사용자를 모으는데 10년 걸렸어요. 페이스북에게 중요한 점은, 그들은 단지 서비스나 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터넷에 대응하는 어떤 근본적인 인프라를 만들고 있어요. 

스티브 잡스: 저는 마크 주커버그를 존경합니다. 저는 그에 대해 조금 밖에 모르지만 회사를 팔지 않은 그를 존경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회사를 만들고 싶어서였겠죠. 그걸 존경합니다. 매우.



마치며

글로 쓰는 말은 입으로 하는 말과 매우 다르다. 그래서 말투를 조금 고치고, 의식의 흐름을 문장 단위로 나누고, 문단 안에 문장들을 재배치했다. 요는, 원래 읽었던 것을 다듬는게 아니라, 이야기되었던 단편들을 다시 엮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인터뷰한 모든 이들의 말 리듬이나 언어의 특징을 담기 위해 신경썼기 때문에, 여러분이 읽을 때 마음이 느낀 것은 그 단어 자체가 아니라 화자의 진정성, 화자의 삶의 의미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글의 대부분의 말들은 이 기사를 위해 특별히 인용을 허락받은 것이다. 그들의 인터뷰와 인용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몇 가지는 이전에 출간된 인터뷰를 인용했다. 

마크 주커버그의 인용은 2005년 하버드의 컴퓨터공학과 초청강연, 같은 해 하버드 크림슨에서 한 인터뷰에서 한 것이다. 더스틴 모스코비츠의 말은 2008년 12월 청년운동연합의 기조연슬과 데이빗 커크패트릭의 <페이스북 임팩트>에서 가져왔다. 데이비드 최의 말은 2016년 3월 하워드스턴 쇼에서 한 말이다. 스티브 잡스의 발언은 월터 아이작슨의 전기에서 인용했다. 이 인터뷰는 2011년 잡스가 죽고 난 뒤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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