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는 왜 승리호에 310억이나 쓴걸까?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이 영화를 매개로 국내 영화산업과 넷플릭스의 전략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입니다.


일단, 스포 없는 영화에 대한 정보와 감상평

  • 아주 잘 만든 스페이스오페라 영화입니다. 무엇보다 눈이 너무 즐거워요. 어설프지 않아요.
  • CG는 정말 다시 한 번 보고 싶을 정도로 괜찮아요. 위지윅과 덱스터 등 국내 업체들의 작품입니다.
  • 설정, 캐릭터와 서사는 어디선가 본듯한 것들의 조합입니다. 익숙하고 예측 가능하지만, 그래서 낯설지 않아요.
  • 업동이(유해진 목소리의 로봇)와 꽃님이가 씬 스틸러입니다. 계속 기억에 남아요.
  • 남녀노소 다 좋아할 만한 영화입니다. 만약 코로나 시국만 아니었으면 부모님께 보여드릴 수도 있을 영화.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한 팩트들



극장 중심의 한국 영화산업

한국의 영화산업은 연간으로 2.5조원 규모입니다. 좀 더 숫자를 이야기하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자주 극장을 찾는 편입니다. 1년에 평균 4.37회 극장에 가고 총 극장 관객 수가 연간 2.3억 명에 달해요. 그래서, 한국의 영화산업 중 76.3%에 해당하는 1.9조원이 극장에서 발생하는 매출입니다.

영화산업에는 다양한 매출이 있습니다. IPTV나 OTT로 유통되는 디지털(2차) 수익, 국내 영화가 해외에 판매되며 거두는 해외 매출도 있죠. 최근 OTT가 엄청 성장하고 있고요. 하지만 이 모두를 합친 것보다 극장 매출이 세 배 큽니다. 국내 영화산업이 CGV를 가진 CJ, 롯데시네마를 가진 롯데, 메가박스를 가진 중앙(예전엔 쇼박스계열이었죠) 중심으로 돌아가는게 이 이유입니다.

그러니 한국에서 영화를 한다는 건 어쩌면 (고객보다는) 멀티플렉스의 니즈를 맞추는 것일지도/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매출의 3/4 이상이 극장에서 나오고, 스크린 수에 상당부분 비례하니까요. 이건 글로벌에서도 가장 높은 의존도에요. 미국은 극장 매출이 전체 영화산업 매출의 절반이 되지 않습니다. 인당 영화 관람 수도 우리나라보다 20% 이상 낮은 3.5회에요.


천만영화, 블록버스터, 텐트폴

‘텐트폴’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텐트를 지지하는 지지대처럼, 산업의 (주로 재무적) 성과를 책임지는 작품을 이야기하는 말이죠. 이 맥락에서 영화산업에서의 ‘텐트폴’이란, ‘멀티플렉스에서 확실히 돈을 벌어줄 수 있는’ 작품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걸 위해서라면, 수백억의 투자도 가능해요.

역으로 말하면 수백억의 투자를 땡기려면 멀티플렉스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전략적 기획을 해야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극장의 니즈를, 대중의 입맛을 고려해야 하죠.

‘집에서 보지 않고 확실히 큰 화면에서 빠방하게 봐야 하는’ 영화. 240억이 투입된 <승리호>는 손익분기점이 580만 명이었습니다. 이건 매니아들로만 만들 수 있는 숫자가 절대 아닙니다.

여기 하나 또 요건이 추가됩니다. ‘영화 매니아가 아니어도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여야 합니다. 제가 앞서 1년에 영화 4편 쫌 넘게 보는 우리나라가 세계 1등이라고 했죠. 우리 주변에야 CGV VIP가 넘쳐날지 몰라도 대중은 극장을 그리 자주 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인, 그래서 극장으로 오게해야하는, 그런게 텐트폴이에요.


어렵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엔터테인먼트

에버랜드의 티익스프레스를 탈 때 뭔가를 재고 따지지 않죠. 멀티플렉스의 텐트폴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장르에 빠삭하지 않은 사람도.. 그러니깐 ‘머글’도 별 생각 없이 2시간을 즐겁게 볼 수 있어야 해요. 실제로 천만 영화를 목표로 기획했다면, ‘머글’의 기준도 훨씬 더 낮춰야 했겠죠.

<승리호>는 여러 서브장르에서 쓰였던 클리셰를 그대로 가져다씁니다. 사이버펑크(지구)와 스팀펑크(타이거박의 엔진실)의 비주얼이 그대로 가져다쓰이고, 화성식민지와 우생학이라는 설정도 평면적이에요. 갑자기 찾아온 (너무 귀여운) 아이를 지키기 위해 우주해적들이 갑자기 뭉친다는 것도..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k-서사입니다.

크으 K-우주 취한다

심지어 인물과 대사도 전형적입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캐릭터들이, (솔직히 좀 그런) 예상 가능한 멘트들을 쳐요. 어디 한 번 시작해볼까.. 이런 느낌. 하지만 그게 이 텐트폴의 역할입니다. 2시간 동안, 누구든 좋아할 만한 놀거리, 즉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것이에요. (스콜세지가 말했듯) 시네마라기보단 말이죠.

‘천만’이라는 숫자는 영화가 극장에 복무할 때, 그리고 관객에 머글이 다수 포함되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아주 상투적인 표현을 빌려, ‘명절에 부모님/친척들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여야 합니다. 물론 매니아들이 재관삼관 해서 천만을 달성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아주 둥글둥글한 영화가 천만 혹은 그 이상을 가죠.

승리호 지구 모습 이미지 검색결과

역대 박스오피스 랭킹을 볼까요. 탑5는 명량 – 극한직업 – 신과 함께 – 국제시장 – 어벤져스: 엔드게임 입니다. 그리고 기생충이 겨우 천만을 넘겼고, 설국열차는 천만이 안되어요. 밀정이나 범죄도시도 천만이 안됩니다. 승리호는 이들보다 더 대중적인, 그러니까 더 쉽고 편한 그런 작품으로, 애초에 기획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음, 그러기엔 승리호는 너무 덩치가 큰 것 아니냐고요? 사실 그렇지 않아요. 극장산업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영화시장은 (코로나 이전) 2019년 기준 세계 4위입니다. 미국, 중국, 일본 바로 다음이 한국이었어요. 영국 프랑스 인도 독일 멕시코 러시아가 그 다음이고요. 세계 4위 시장인데 이정도는 뭐,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천만이라는 마일스톤을 마주한 넷플릭스

작년 12월의 OTT 월 사용자 순위입니다. 넷플릭스는 압도적인 1위고, 900만을 넘어섰어요. 자, 천만이 이제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래서 넷플릭스는 고민이 시작될 것입니다.

아마 한참 전부터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겠죠. ‘아, 어쩌면, 이제 씨네필/ 매니아들은 이미 다 들어와버린 것일까?’

뭐 넷플릭스를 1년 이상 써왔다거나 하는 사람들 다수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랭킹이 말해주듯이 한국사람들은 넷플릭스에서 한국 콘텐츠를 봅니다.

<런 온>이나 <경이로운 소문>을 보고, <미스트롯2>나 <아는형님>을 봐요. 물론 지금 읽고있는 여러분은 안타깝겠죠. 넷플릭스에 얼마나 주옥같은 콘텐츠가 많은데 고작 그런걸! 하지만 그게 팩트에요.

넷플릭스는 수입원이 딱 하나, 사용자들의 월 구독료입니다. 웹소설처럼 콘텐츠당 과금을 하지 않아서, 매니아들로만 비즈니스를 애초에 할 수 없고 사업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무조건 가입자를 더 모아야 해요.

넷플릭스 월 결제액 이미지 검색결과

현재 넷플릭스는 900만 이상의 월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제 가입자를 더 늘리려면, ‘머글’을 데려와야 해요. 부모님에게 넷플릭스를 권한다고 할때, <브리저튼>보단 <승리호>가 낫지 않겠어요. <365일>은 무리..

비교를 위해, 왓챠는 작년 <이어즈 앤 이어즈>를 가져온 것처럼 매니아들이 확실히 좋아하는 콘텐츠를 가져오는데 힘을 쓰고 있습니다. <킬링 이브> <와이 우먼 킬>이나 <데브스> 같은, 다수는 아닐지라도 특정 집단이 열렬히 좋아하는 – 즉 팬덤이 있는 콘텐츠를 가져오고 있어요. 이건 왓챠의 현재 규모와 타겟 전략에 기인하죠.


그 때의 넷플릭스와 지금 넷플릭스는 다르다

지금으로부터 3년반 쯤 전인 2017년 6월의 일입니다. 넷플릭스 국내 사용자가 20만이 안되던 시절


그리고 그로부터 1년 반 후, 2019년 초, 옥자 시절보다 국내에서 열 배 커진 넷플릭스는 이랬죠.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대충 보이시나요.

<옥자>를 만들던 시절의 넷플릭스는 1단계. 그야말로 인디/아트하우스(저게 미국에선 인디에요)였습니다. 씨네필이 열광하고, ‘나 넷플릭스에서 옥자봤다’라는 것이 일종의 (배타적) 인증/ 자랑이 되는 시절이었죠. (그때부터 구독했으면 고인물)

<킹덤>을 만들던 넷플릭스는 팬덤 콘텐츠를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특정 장르/서사에 열광하는 팬덤으로 확장되었고, 그들이 주변 팬덤에 넷플릭스와 그 콘텐츠를 영업하도록 전략을 짰죠. (그때 들어왔으면 덕후)

<승리호>는 그 다음 시대의 넷플릭스를 상징합니다. 특별히 콘텐츠에 관심이 크지 않은 사람이라도, ‘음, 영화 한 편 값인데 그냥 한달만 샥 보고 빠질까?’를 고민하게 하는. 그야말로 CGV같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넷플릭스. (아직도 안보면 머글)

이걸 정리하면

  • 1단계: 2017년 <옥자> 시대. 20만. 인디/아트하우스. 씨네필 인증.
  • 2단계: 2019년 <킹덤> 시대. 200만. 팬덤과 장르. 보는 사람 덕후.
  • 3단계: 2021년 <승리호> 시대. 1,000만. 대국민 서비스. 안보면 머글.


그래서, <승리호>는 꿀딜일까?

영화가 공개되기 전까지만 해도 사실 여러 우려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영화가 구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망했을 영화를 사간 가격이 무려 310억이라니 넷플릭스 너무 호구잡힌거 아닌가.. 막 돈을 쓰다쓰다 이제 저런데에도 쓰고.. 아니 아무리 넷플릭스라지만 저거 저래도 되나.. 등등

근데 이렇게 생각해볼까요. <더 크라운> 제작비가 회당 1,300만불(140억), <만달로리안> 제작비가 회당 1,500만불(170억)이에요. 만달로리안 2개 에피 정도 가격이라고 치면, 음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스위트홈>도 제작비가 300억이었거든요. 대신 엄청 오래걸렸죠. 넷플릭스는 급매물을 쿨하게, 꿀딜한 것일지도 몰라요.

전략적으로도 나쁘지 않죠. 말씀드렸듯 그간 한국 영화시장의 절대적인 ‘형님들’이었던 극장들이 코로나 이후로 다같이 맥을 못추고 있는 상황에, 텐트폴들을 넷플릭스가 줍줍해버리면 확실히 판의 헤게모니를 가져가버릴 수 있거든요.

자, 현재 개봉이 밀려있는 다른 텐트폴 담당자들이, 넷플릭스 앞에 가서 줄을 선다 안선다? 가격을 낮춘다 안낮춘다?

물론 우려의 목소리도 있겠습니다만

거기다가 가성비로 샀는데 막상 열어보니 글로벌 1위!! 인게 아니라 진짜로 이게 <킹덤>이나 <스위트홈>에 이어 한국식 콘텐츠로 글로벌에서 먹힐지도 모릅니다. 진짜 우리 나름 국뽕차도 되는게, 영화 세계 4위 시장에서 세계 1위 콘텐츠 나오는게 이상한게 아니에요. 아니 작년에 아카데미를 휩쓴 작품이 뭐였더라? 그게 갑툭튀가 아닐 수도 있어요. k-콘텐츠는 이제 시작이다?

‘시리즈’에 대한 가능성도 봤을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이 영화는 캐릭터가 아주 선명하고, 캐릭터 디자인도 괜찮고, 특히, ‘가족’ 시장에게 어필할 수 있습니다. 애니로도 만들 수도 있고요. 하긴, 카카오페이지/다음웹툰에서는 이미 웹툰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죠. 이걸 넷플릭스가 이어간다 안간다?


하긴 다 이게 (<옥자>도 <킹덤>도 그랬듯) <승리호>가 재미있으니 풀 수 있는 썰이죠. 아 진짜 여러분 속는 셈 치고 보세요. (광고 아님)

https://www.netflix.com/kr/title/81094067


같이 읽어보면 좋을 OTT/콘텐츠 업계 이야기들


  • 글: 뤽
    • 200208 업데이트: 제작/투자사, CG 관련 오류 정정합니다.


넷플릭스는 왜 승리호에 310억이나 쓴걸까?”의 5개의 생각

  1.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잘 쓰시네요~ 저도 2탄을 기대합니다. 조성희 감독은 아직 하고 싶은것들이 더 많을듯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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